강바람의 유적답사

(1) 양주 회암사(檜巖寺)터 답사기 --- 발굴완료된 회암사터.

미호강 2019. 5. 17. 20:58

회암사터를 찾으니 30여년전 처음 방문할때의 추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도저히 상상이 않될 정도의  방대한 규모에 놀랐고 또한 절 터가 아낌없이 파괴된채 깊은 숲속에 묻혀 있는 사실에 더욱 놀란 적이 있었지요.

주춧돌, 기단 등 일부만 보이던 엣 터를 10여년이나 발굴한후 유물을 보관할 박물관까지 세운 모습을 보면 상전벽해는 이를 두고 하는 말인것 같습니다.


회암사는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으며 조선초에 불교계를 선교양종으로 통폐합할때에도 선종(禪宗) 본찰로서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불교계를 사상적으로 이끌었던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등의 고승들이 주석한 최고의 가람이었구요.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현재처럼 큰 규모의 사찰이 된것은 고려말 인도의 고승인 지공이 "회암사의 산수형세가 천축국(현재 인도)의 나란타사와 같기 때문에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것"이라고 하였고,

그 제자인 나옹이 그러한 뜻에 따라 대대적인 불사를 이루면서 입니다.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의 왕실인물이 대규모 불사를 단행하여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습니다.


30여년전의 인연을 계기로 해마다 회암사터를  찾아보곤 하는데요.

오늘도 절터와 시립박물관, 회암사 삼화상(三和尙) 부도까지 세세하게 살펴보았지만 보면 볼수록 참으로 경이롭다는 생각입니다.

아름다운 옛 문화유적에 푹 빠진 하루였습니다.



* 양주 천보산 아래에 자리한 회암사터.

회암사는 언제 창건되고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히 알길없는 신비한 절입니다.



* 왕궁을 방불케 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회암사터.

조선 건국 다음해부터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이 회암사의 주지를 맡았으며, 태조는 회암사를 자주 찾기도 하고 토지를 하사하기도 했다고.

또한 조선 전기에는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불교행사를 대부분 회암사에서 시행했다고 합니다. 



* 회암사터 당간지주.



* 사찰인지 왕궁인지 전각배치가  왕궁을 방불케 하는 회암사의 웅장하고 섬세한 유구 모습.



* 비록 폐사되었지만 유구가 화려하고 방대하여 더욱 애착이 가는 회암사터.



* 회암사터 수조.



* 지하석실 모습을 하고 있는  해우소 터.

승려수만 해도 3,000명에 이르렀다니 화장실도 클수밖에.



* 발굴현장을 잘 정비하여  답사를 용이하게 한 회암사터.



* 절터의 중심건물인 보광전이 있던 자리 주위.



* 관솔불을 밝히던 정료대.



* 태극문양과 함께 화려하게 조성된 소맷돌과 돌계단.



* 우물터.



* 건너편에 있는  맷돌과 수조 - 부엌이 있었던듯.



* 회암사 설법전이 있던 터.



* 법당 앞에는 어김없이 불을 밝히던 정료대.



* 설법전터 위로는 사리전이 있던 자리.



* 가장 북단에 위치한 제5권역으로 정청(正廳) 등 주요 전각이 있던 곳.

정청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전각으로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머물렀던 곳이며, 생일에도 회암사에서 지낼만큼 즐겨 찾았다고.

정청 좌우에는 방장(方丈, 사찰의 큰스님)터가 있음은 정청을 더 중요시 여겼다는 증거.



* 화려한 모습의 회암사터 부도탑.



* 조선 전기 작품으로 추정되나 부도의 주인은 아직 모호한 실정.

높이는 3.6m이며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여 주목됩니다.



* 절터의 가장 윗쪽(북쪽)에서 바라본 회암사터 전경.



* 마치 구중궁궐을 방불케 하는 방대하고 화려한 회암사터.

무학과 인연을 맺은 태조 이성계에 의해 크게 중창되고 말년에 이 절에서 기거하기도 하였다니 보면볼수록 신비하고 경이로운 절터가 아닐수 없네요.



1566~1595년 사이에 유생들에 의해 불태워진 후
방대한 절 터가 500년 가까이 흙속에 묻혀 있다가 완벽하게 발굴되었다니 믿어지질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