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바람의 국내여행

(1) 덕수궁 --- 고종의 혼이 담긴 마지막 조선왕조의 궁궐

미호강 2020. 10. 26. 20:40

조선 왕조의 마지막 궁궐인 덕수궁(德壽宮)! 

망해가는 조선왕조를 보는듯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비운에 찬 궁궐입니다.

꺼져가는 마지막 힘을 일으키고자 온 국력을 다해 지었건만 덕수궁의 수명은 채 20년을 넘기지 못하고 일제에 의해 무참히 훼손되었으니 이보다 더 안타깝고 분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는데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퇴위한 후 태황제 고종의 궁호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 하였으며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지요.

조선 후기까지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이 없었는데요.

고종 말년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이 열강들의 영사관들이 주위에 밀집한 덕수궁으로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전각들을 갖추게 된것 입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고종은 추락한 위신을 만회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하여 덕수궁을 지었습니다.

고종 32년(1895)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이듬해인 1896년 경복궁에서 아관(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였는데 

고종은 아관에 머물면서 덕수궁에 전각짓는 일을 지휘하였고 공사가 완료될 즈음  1897년 아관을 떠나 덕수궁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후로도 궁 영역은 계속 확장되며 왕궁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900년 1월에는 궁담을 쌓았습니다.

그러던중 광무 8년 (1904) 큰불이 나서 덕수궁의 대부분이 소실되는 참화를 당하는데 건립한지 몇년도 않되어 거의 모든 전각을 불로 태워 버렸으니 안타깝기가 그지 없네요.

 

화재원인은 함녕전 온돌에 불을 지피던중 부주의로 건물에 불이 붙어 화재가 난것으로 고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러나 고종실록은 일제강점기 시절 총독부 산하 이왕직에서 편찬한것 이라 액면그대로 믿어서는 않됩니다.

당시 왜에 협조를 거부하며 러시와와 긴밀한 관계를 기하려는 고종에 대해 일본의 극악무도한 보복이었으니

바로 고종을 불태워 죽이려 한 일본의 방화였음은 주지의 사실!

명성황후를 살해 한 후 이도 모자라 고종황제까지 불태워 죽이려 했으니 일본의 만행은 이루 표현할 길이 없네요.

화재 이후 덕수궁 복원공사는 즉시 시행되어 1906년까지 즉조당, 석어당, 준명당, 함녕전, 양이재, 중화문, 대한문 순서로 다시 지어졌으며 1910년에는 대규모 서양식 석조건물인 석조전이 건립되었습니다.

 

1919년 고종황제가 운명하자 일제는 기다렸다는듯이 덕수궁의 전각들을 무참히 헐고 궁역은 매각되거나 공공건물이 들어서며 잠식되었는데요.

정전과 침전이 있는 현재의 영역은 원래 덕수궁의 1/3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1922년, 북쪽으로 통하는 돌담길을 뚫었고, 선원전 영역에는 경성제일여고(옛 경기여고)가 들어섰으며,  혼전 영역에는 1923년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지금 덕수초교), 1926년에는 경성방송국,  나머지 터는 분할매각되어 민가가 들어서거나 서양의 종교건물들이 들어 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전각들이 헐려 나간것 입니다.

그후 1933년에는 영복당, 수인당 등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그해 공원으로 개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덕수궁의 훼손은 쉬임없이 진행되었는데요.

해방후 군정시절엔 중명전 주위가 미국대사관 부지로 일부 편입되었으며,

특히 정문인 대한문 일대의 훼손이 심했는데 1914년 태평로 개설때 저촉되어 궁역의 잠식은 물론 대한문이 뒤로 밀린 사건이 있었는데,

1968년 태평로 확장때 다시 궁역이 잠식되며 대한문도 뒤로 14m나 밀린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궁담이 먼저 뒤로 밀리면서 한 동안 대한문이 도로 안에 남게 되어 세간을 떠들석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1963년 덕수궁 안에 경제개발5개년계획 종합전시장을 지으면서 전각 몇채가 헐렸으며, 1970년대 초까지 온갖 기업홍보전시가 경내에서 열렸으니 그 전통은 아직까지 이어져 지금도 전각 안에서는 홍보전시가 진행중입니다.

덕수궁은 훼손될대로 훼손되어 황궁으로서의 존엄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는데 근래 복원에 대한 염원이 차츰 고조되니 늦었지만 무척 다행스럽다는 생각입니다.

 

 

*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었으나 1904년 화재 이후 정문으로 삼으면서 대한문으로 바꿈.

 

* 수문장교대식이 열리는 모습.

 

* 정문인 대한문은 태평로 개설, 확장으로 크게 뒤로 밀려난 모습.

 

* 부디 앞으로는 잘 지키어 다시는 비운의 덕수궁이 되지않게 해주길!

 

*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나타나는 금천교.  

 

* 정문이 크게 뒤로 밀려남으로써 대한문과 금천교가 붙은 모양입니다.

 

* 1910년 당시의 덕수궁 영역.  현재는 동쪽과 서쪽, 북쪽이 크게 잠식 당한 모습입니다.

 

* 앗, 광명문(光明門)! 원래 함녕전의 정문이었는데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아 왔네요

 

* 예전에는 중화문 남쪽에서 흥천사종, 자격루 등의 보호각처럼 쓰였는데 근래 제 자리를 찾아 왔네요.

 

* 중화문 앞에 있는 옛 인화문(仁化門)터의 흔적.   일제때에는 남쪽으로 넘어다니는 구름다리가 만들어지기도

 

* 드디어 중화전의 정문인 중화문!

 

*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보물 제819호).

 

* 원래는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 이후 복원할때에는 단층으로 건립.

 

* 천자국의 위상을 드높히고 있는 중화전 석계.

 

* 중화전 내부 모습.

 

* 중화전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쌍룡.

 

* 1910년에 건립된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과 1938년에 지은 석조전 별관,  그리고 서양식 분수정원.

 

* 석조전은 고종황제를 위해 마지막으로 지었으나 실제 침전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해방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 1938년, 뒤늦게 지어 이왕가미술관으로 사용한 석조전 별관.

 

* 중화전에서 바라본 함녕전 영역.  전각의 일부만 남아 휑한 모습.

 

* 우아한 모습의 2층 건물인 석어당(昔御堂).

 

* 광해군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고 인조반정때에는 광해군이 문책 당했다는 석어당.  선조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고.

 

* 나란히 붙어 있는 왼편의 준명당(浚明堂)과 오른편의 즉조당(卽祚堂). 

 

* 1904년 대화재 이후 다시 지은 준명당, 즉조당.

 

*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외국사신을 접견했던 준명당.

 

* 즉조당은 원래 경운궁의 정전으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

 

* 측면에서 바라본 즉조당과 석어당.

 

* 우아한 모습의 유현문(有賢門)과 전통담장.

 

* 벽돌로 예쁘게 쌓고 전통담장으로 연결한 유현문.

 

* 함녕전(咸寧殿), 보물 제820호

 

* 1907년 강제 퇴위당한 고종이 1919년 승하시까지 머물던 침전.

 

* 일월오봉병이 설치되어 있는 함녕전.

 

* 함녕전은 1904년 대화재의 진원지로 알려졌는데 고종을 미워하던 일제의 방화임이 명명백백!

 

* 함녕전 옆에 있는 덕홍전(德弘殿).  고종이 귀빈을 접견하던 편전.

 

* 함녕전 영역의 행각.

 

* 정문 안쪽에 있는 연못은 원래의 것은 아니고 일제 이후 조성한듯.

 

* 연못 옆 정원은 예전 궁궐 안 관청들이 있던 궐내각사터.  

 

* 일제때 이후 서울시청 앞 방향의 동쪽에 태평로를 만들면서 여러채의 건물이 철거되고 터가 많이 잠식된 상태.

 

* 덕수궁 후원에는 서양식건물이 들어 서기도!

 

* 1900년경에 지은 한국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정관헌(靜觀軒).

 

*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외국사절들과 연회를 즐기던 곳.

 

* 정관헌에서 바라본 함녕전과 덕홍전.

 

* 후원에 있는 전통문양의 굴뚝.

 

* 석조전 뒷편에 복원중인 돈덕전(惇德殿).

 

* 내년까지 복원될 돈덕전은 1907년 순종이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장소였으나 1922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고.

 

* 앞에 마로니에 고목이 버티고 있는 평성문(平成門).  미국대사관저와 마주하고 있으며 돌담길로 나갈수 있지요.

 

* 일제때인 1922년 덕수궁 영역을 훼손시키며 만든 돌담길(영성문고갯길).  사랑과 낭만의 길이라는 덕수궁돌담길은 실상 외세 침탈의 길이라고 해야  맞겠지요.

 

*  옛 지도를 보면 돈덕정은 현 위치보다 서쪽으로 치우처져 있는데 1922년 북쪽으로 관통하는 돌담길을 건설하면서 저촉되어 철거한 것으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