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옛길, 봉화길 제7길 세종효종길을 걷다 --- 세종대왕릉역~영릉~여주역 11km
2025,3/7(금) 경기옛길, 봉화길 제7길 세종효종길을 걸었습니다.
봉화길 제7길 세종효종길은 세종대왕릉역~이인손 묘~영릉~대로사~여주역까지 11km 구간으로
사부작사부작 여주의 마을길과 들녘을 걷다가 이인손 묘와 영릉을 탐방하고 세종산림욕장에서 남한강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여정이었는데요.
먼저 만난 충희공 이인손 묘(忠僖公 李仁孫 墓).
이인손(1395~1463)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 시절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고 세조때에는 우의정에 오른 분.
원래는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는 왕대리에 있었으나 자리를 내주고 1469년(예종 1) 현재의 자리인 새미실마을 북쪽으로 이장한 역사가 있지요.
오늘은 급할게 없으니 코스에 관계없이 영릉도 찬찬히 살펴 보았는데요.
특히 영릉(英陵)은 몇년전 차량이 다니던 진입도로, 주차장 일대에 소나무를 심고 재실도 복원하는 등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릉을 변신시켰으니 크게 환영하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의 릉으로 하나의 봉분 아래 석실 2개를 붙여 왕과 왕비를 함께 안치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입니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릉으로 처음 구리 동구릉에 릉을 조성하였으나 1674년(현종 14)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1674년 인선왕후가 돌아가자 왕후의 언덕을 아래에 조성하여 조선왕릉중 최초의 동원상하릉 형식이 되었습니다.
릉 남쪽에 위치한 낮으막한 세종산림욕장을 걸어 오르니 눈 앞에 펼쳐지는 남한강~!
예전엔 배, 뗏목들이 수없이 다녔고 민초들의 애환과 사연도 많았을테지만 지금은 무심히 강물만 흐르고 있네요.
은행나무가 줄지어선 남한강변에서 만난 대로사(大老祠)는 처음 대하는 유적지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요.
대로사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뜻을 기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정조가 내탕금을 하사하여 지은 사당으로 대로(大老)는 바로 송시열을 말합니다.
정조는 송시열이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추진한 것이 대로(大老)의 표본인 강태공과 같다고 하여 대로사라고 하였으나
고종 8년(1871) 전국의 서원을 철폐할때 송시열을 모신 전국의 44개 서원이 모두 헐렸으나 대로사만 남겨 강한사(江漢祠)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여주 도심지를 걸어 만난 소양천.
소양천을 대하니 남한강은 수운교통의 발달로 편리함을 얻었겠지만 소양천은 가까이에서 식수와 생활용수를 주는 생명수 역할을 독톡히 해온것 같았습니다.
제7길 마무리를 얼마 남지않은 시간에 만난 여주향교.
문이 굳게 잠겨 들어갈수 없지만 현존 건물은 앞쪽에 명륜당, 뒷쪽에 대성전, 내삼문, 동무, 서무 등이 있다고 하네요.
조선시대때만 해도 여주지방의 인재양성에 크게 기여하던 국립학교였지만 이젠 할 일을 근대교육시설에 빼앗긴채 쓸쓸한 모습.
다녀간 이틀후인 3/9(일) 여주향교 대성전에서 춘기 석전봉행 행사를 거행했다고 하니 참관하지못한 아쉬움이 크네요.
지난 2/17(화) 시작한 봉화길은 하남 한강변에서 출발하여 7번을 걸으며 남한산성, 광주시, 이천시를 거쳐 여주역까지 왔습니다.
8부 능선을 넘은 기분인데요.
그런데 봉화길이 제7코스에서 뜬금없이 동쪽으로 뻗어 여주까지 갔다가 끝나 버렸지만 제8길, 9길에서 별도로 남쪽지역을 걷도록 하였는데요.
이는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옛길 당국의 배려에서 나온 코스로 생각되며 경북 봉화가 남쪽에 있기 때문이니 어쩌면 이 코스가 맞을것 같고 몇해전 영남길을 걸을때에도 부근의 마이산 자락을 넘던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 남은 제8길, 9길을 잘 마무리하여 완주코자 합니다.

여주시 세종대왕면에서 봉화길 제7길을 시작합니다.
여주쌀의 주산지인 능서면에는 영릉이 있기에 3년전에 세종대왕면으로 바뀐 역사가 있지요.

곤지암역에 자차를 세워두고 경강선을 이용하여 세종대왕릉역에서 하차.
경강선이 있어 편리하게 전철을 이용하니 봉화길을 걷기가 아주 좋으네요.ㅎㅎ

봉화길 제7길 세종효종길은 세종대왕릉역~이인손 묘~세종대왕기념관~대로사~한글시장~여주역까지 11km 구간으로
영릉을 참배하기 위해 임금이 걸었던 거둥길이라는 설명.

역 앞의 신개발지를 잠시 걷다가,

경강선 철길과 나란히 걷는 길.
오늘은 거리도 비교적 짧고 유적지도 여러 곳이라 걷는게 무척 흥미롭네요.

경기옛길 표지는 거리가 틀린 곳이 많지만 그래도 반갑기만.ㅎㅎ

중부내륙고속도로 토끼굴을 지나 만나는 이인손 묘.

강아지들이 맞이해 주는 이인손 묘소 사당인 숭모재(崇慕齋).

재실 앞에 방문객을 위해 물과 커피를 준비해 놓은 모습.
따스한 인정에 감사를 드립니다~~!!

충희공 이인손 묘(忠僖公 李仁孫 墓).
이인손(1395~1463) 선생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 시절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고 세조때에는 우의정에 오른 분.
원래는 세종대왕의 영릉이 있는 왕대리에 있었으나 자리를 내주고 1469년(예종 1) 현재의 자리인 새미실마을 북쪽으로 이장한 역사가 있지요.
너무 좋은 명당터에 묻히면 이런 일이 종종 발생했다지요.ㅎㅎ

그림같은 모습의 이인손 묘와 사당.
그런데 묘소 주위의 소나무들을 모두 벌채하여 벌거숭이가 되었으니 뭔 일인가요?
예전에는 봉화길이 솔밭 안을 걸었을텐데 재선충병이 돌았나요.흑흑!

능서공원길 도로를 건너 농촌길을 걸으며 봄을 만끽!

서여주IC 남쪽의 중부대로 토끼굴을 3개나 연이어 지나니,

여주시 번도4리.
은밀한 곳에 조용하게 예쁜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네요.

번도4리 마을길을 걸어,

여강길 이정표가 서있는 낮으막한 고갯길을 걸으니,

작은 고개를 넘으니 다시 중부대로가 나타나네요.
중부대로는 수원~용인~이천~여주를 연결하여 영동고속도로의 우회도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지요.

번도5리의 낮으막한 고개를 넘으려니 조금 전에 여강길이 지나는 숲길로 왜 코스를 정하지 않았는지 아리송.??

조용한 숲속에 웬 넓은 논이~~??

여주 번도리의 한가한 시골길을 걸으려니 무척 홀가분한 기분.ㅎㅎ

이제부턴 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야 하는 코스.
고갯길 우측에 있는 음식점(솔밭정원)에서 맥주 한잔에 된장찌개 백반으로 점심식사.

고개를 넘으니 왼편에 영릉의 세종대왕기념관이 보이기 시작.
봉화길 제7길은 큰 어려움없이 사부작사부작 걷고 영릉(英陵), 영릉(寧陵)까지 답사하게 되어 의미가 크다는 생각.ㅎㅎ

오늘은 급할게 없으니 코스에 관계없이 영릉을 찬찬히 살펴볼 생각~!
몇년전 차량이 다니던 영릉 진입도로, 주차장 일대에 소나무를 심으며 공원화하여 크게 변신시킨 모습.
도로 400m를 폐지하고 공원조성과 함께 도보로만 통행토록 하였으며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릉을 복원한 조치에 크게 환영하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먼저 찾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계신 영릉(英陵).
옛 재실터를 확인한 후 5년전에 다시 복원한 영릉 재실 모습으로
원래의 재실은 1970년대 복원사업때 다른 위치에 불완전하게 건립하였기에 금번 원위치에 완벽하게 복원한것 이지요.

영릉 입구에 있는 방형의 연지(蓮池)는 다른 릉에서는 보기 어려운 사례.
원래 릉마다 연지가 모두 있었는지 여부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매몰되었는지는 연구해 볼 일~!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의 릉.
하나의 봉분 아래 석실 2개를 붙여 왕과 왕비를 함께 안치한 조선왕릉 최초의 합장릉입니다.

줄지어선 아름다운 영릉의 노송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재선충병이 유행하고 있으니 얼마나 오래도록 건강을 유지할수 있을지 걱정이 큽니다.

영릉은 1469년(예종 1)에 이곳으로 옮겨올때 봉분 내부를 석실에서 회격으로 바꾸어 조성하였고 석물중 망주석, 장명등, 석수, 석인은 단릉처럼 배치하였으나 혼유석만 2개를 설치하여 합장릉임을 나타냈으며 봉분 둘레는 난간석을 두르고 황석주를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
릉의 위치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으로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릉 수복방과 반송은 한 폭의 그림같은 아름다운 풍경.

이젠 왕의 숲길을 걸어 효종이 계신 영릉을 찾아 갑니다.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과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릉!
영릉은 처음 구리 동구릉에 릉을 조성하였으나 1674년(현종 14) 지금의 위치로 옮겼으며
1674년 인선왕후가 돌아가자 왕후의 언덕을 아래에 조성하여 조선왕릉중 최초의 동원상하릉 형식이 되었습니다.

동원상하릉 형식으로 앞쪽은 인선왕후, 뒷쪽은 효종의 릉.

영릉의 재실(齋室) 모습.
조선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으로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1659년 동구릉에 처음 지어진 것을 1673년(현종 14) 왕릉을 이곳으로 옮길때 함께 옮겨 왔다고.

재실 영역과 안향청 영역 경계에 있는 느티나무 고목.
느티나무 외에도 회양목, 향나무 등 고목들이 재실의 오랜 역사를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네요.

300여년 역사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영릉 재실내 회양목.

릉 밖에 조성한 가티길을 따라 다시 봉화길을 찾아 갑니다.

이젠 릉 남쪽에 위치한 세종산림욕장을 걸을 차례.

스토리보드와 같이 있는 스템프함.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때 치욕적인 항복이후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잡혀있다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른 효종이 북벌의지를 불태우다 요절하였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네요.

영릉을 영릉이라 하지않고 세종대왕릉이라고 새긴 스템프가 좀 어색하지만 그래도 스템프는 정확하게~~!!

낮으막한 세종산림욕장을 걸어 오르니,

제7길에서 같이 만나는 봉화길과 여강길.
일부 코스가 같은 여강길은 남한강을 따라 걷는 도보여행 코스여서 한번 걸어봐야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세종산림욕장 야산에 오르니 8각정자.

오호, 여주를 흐르는 남한강`~!
날씨는 흐리지만 바로 앞에 양섬, 멀리 여주대교와 신륵사가 위치한 봉미산이 보입니다.

양섬을 돌아나가는 샛강변에는 국토종주자전거도로.
11년전 싸이클을 타고 이 길을 따라 인천 정서진에서 부산 을숙도까지 완주했던 추억이 엊그제같습니다.ㅎㅎ

은행나무가 줄지어 선 남한강변.

넌 냄새가 아주아주 지독한 암놈이지?

태백 검룡소에서 발원하여 여주를 흐르는 남한강.
예전엔 배, 뗏목들이 수없이 다녔고 민초들의 애환과 사연도 많았을테지만 지금은 무심히 강물만 흐르고 있네요.

남한강변에서 만난 대로사(大老祠).
대로사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뜻을 기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정조가 내탕금을 하사하여 지은 사당으로 대로(大老)는 바로 송시열을 말합니다.
정조는 송시열이 효종을 도와 북벌계획을 추진한 것이 대로(大老)의 표본인 강태공과 같다고 하여 대로사라고 하였으나
고종 8년(1871) 전국의 서원을 철폐할때 송시열을 모신 전국의 44개 서원이 모두 헐렸으나 대로사만 남겨 강한사(江漢祠) 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여주시민들은 강한사는 격이 낮아진걸로 생각하여 원래의 이름인 대로사로 고집하더군요.
격하게 동의합니다 ~~!!

처음 맞이한 추양재(秋陽齋).
유림들이 회의를 하거나 관리인이 상주하는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예절학교로 활용중.

대로사비가 있는 비각.

우람한 비신에 큰 글씨가 멋드러지게 새겨진 대로사비(大老祠碑) .
1787년(정조 11) 세웠으며 정조가 직접 비명과 비문을 짓고 직접 쓴 글씨를 정교하게 새긴 모습.

앞면에는 전서체로 대로사비, 나머지 삼면에는 사당을 세운 대의와 송시열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 비를 세우게 된 내력을 적었다고.

영릉이 위치한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로사.
송시열은 여주에 머물때마다 이곳에서 효종이 잠들어 있는 영릉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후진들에게 북벌의 대의를 주장하였다고.
이후 정조가 영릉에 행차하다가 이 말을 전해듣고 사우를 세우게 하였으며 친히 비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내삼문을 들어가면 만나는 대로사.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공간으로 무척 단아하고 엄숙한 전형적인 모습으로 강한사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대로사 현판이 걸려 있네요.
고종 당시에는 대로로 불리는 인물이 송시열과 흥선대원군 두 사람이었는데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일수 없다'하여 흥선대원군의 명에 의해 바뀌었다는 후문.

남한강을 바라보며 중앙부에 있는 대로서원(大老書院)의 강당인 첨백당.
사당이 주이지만 대로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걸로 보아 서원 역할도 충실히 했을것 같은데요.
옛날 넓직한 마루에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공부하던 유생들이 떠오르네요.ㅎㅎ

대로서원, 첨백당, 강한사, 강한루 현판이 걸려 있는 대로서원 첨백당.

대로서원 안에 걸려 있는 강한사 현판.
강한사 현판은 조선 말기의 문신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왕명을 받들어 쓴 글씨라고.

대로사 탐방을 잘 한 후 여주 시내에서 만난 여주한글시장.
영어가 난무하여 어지러운 세상에서 한글시장이라니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ㅎㅎ

제법 도시계획이 잘 된 시내를 걸으니,

도장교에서 만난 소양천(沼陽川).
오호, 여주 중심부를 흐르는 고마운 하천이 있었네요.
남한강은 수운교통의 발달로 편리함을 얻었겠지만 소양천은 가까이에서 식수와 생활용수를 주는 생명수 역할을 독톡히 해온것 같습니다.

소양천을 따라 제방길을 계속 걸으니,

제7길 마무리를 얼마 남지않은 시간에 만난 여주향교(驪州鄕校).
문이 굳게 잠겨 들어갈수 없지만 현존 건물은 앞쪽에 명륜당, 뒷쪽에 대성전, 내삼문, 동무, 서무 등이 있다고 하네요.
조선시대때만 해도 여주지방의 인재양성에 크게 기여하던 국립학교였지만 이젠 할 일을 근대교육시설에 빼앗긴채 쓸쓸한 모습.

여주에도 신도시급 아파트단지가 속속 들어서는 중.
널직한 향교1길을 따라 마지막 구간을 잘 걸으니,

드디어 경강선 여주역에서 오늘 봉화길 제7코스 마무리~!

봉화길 제7길 세종효종길은 세종대왕릉역~이인손 묘~영릉~대로사~여주역까지 11km 구간으로
사부작사부작 여주의 마을길과 들녘을 걷다가 유적지도 탐방하고 세종산림욕장에서 남한강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여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