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바람의 유적답사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 피난유허지 답사

미호강 2012. 4. 30. 23:25

2012.4/30(월) 충주 장미산성 답사후 귀경하면서  임오군란때 명성황후가 피난했던 옛 터를 잠시 찾아 보았습니다.

명성황후 피난유허지는 이유로부회장의 고향이기에 그로부터 기히 얘기를 들은적이 있었지만 직접 방문하기는 처음입니다.

 

지금부터 130년전인 1882년 6월 10일, 구식군대의 불만으로 촉발된 임오군란으로 난군들이 궁궐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려하자  황후는 변복을 한채 홍계훈장군의 등에 업혀 간신히 궁궐을 벗어 났고,

홍계훈의 누이 행세를 하며 도성을 무사히 빠져 나가 장호원 민응식(황후의 육촌 오빠)의 집으로 피난할수 있었다고 하며 지금의 유허지는 다시 거처를 옮겨 간 곳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한양에서는 정권을 위임받은 대원군이 황후를 찾아내지 못하자 "황후가 죽었다"고 발표하고 국상절차를 밟았다고 하니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가 이렇게 벌어질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해 8월 1일,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된후 명성황후는 청군의 보호하에 51일만에 환궁함으로써 피난생활은 끝나게 되지요.

이로써 청군과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개입하는 명분을 준 국제적인 사건이 되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수 없네요. 허허허!

 

유허지의 안내문에 의하면 이 집은 이음성의 집이었다고 하는데 어떤 연고가 있었는지는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아 궁금합니다.

당시의 초가집은 언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잘 다듬은 주춧돌만 몇개가 보이는데 황후 피난처임을 나타내기 위해 행궁 건립 시도가 있었으나 중단되었다고 하며 그때의 초석으로 생각됩니다.

 

 *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가 50일간 피난했던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 신흥동마을과 뒷편의 국망산.

국망산은 명성황후가 궁금하여 이 산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 명성황후 유허지 입구 전경.

 

 * 유허지에는 집은 소멸된채 잘 다듬은 주춧돌만 남아 있는데요. 

명성황후가 환궁이후 이곳에 행궁을 지으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중단되었는데 그 당시의 주춧돌이라고 합니다.

 

 * 쓸슬한 명성황후 피난 유허지 주변 모습.

 

 * 그나마 근래 세워져 겨우 체면치레를 하고 있는 "명성황후 피난유허비"

 

* 명성황후의 피난과정을 잘 읽어 보자구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