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바람의 일상

아름다운 미호강에 얽힌 역사문화

미호강 2015. 11. 27. 17:11

 

덕소에서 서쪽으로 한강을 따라 바라보이는 미사강변과 수석동!

미사강변은 예부터 가장 아름다워 미호강이라고 불렀는데

일찌기 겸재 정선은 미호강에서 석실서원, 삼주삼산각이라는 그림 2점을 그려 더욱 유명해졌지요.

아름다운 미호강과 건너편의 수석산에 대한 옛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합니다.

 

 

1) 남양주 수석산은 전략적으로 중요시 되어 백제가 쌓은 "수석리토성"이 있는 곳.

    강변의 낮은 산은 일명. 수석산(해발 81m)으로  산위에는 백제시대에 쌓은 수석리토성(水石里土城)이 있는데요.

    가까운 거리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아차산성과 함께

    산은 비록 낮지만 한강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수 있어 삼국시대 이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어 온 곳입니다.

 

2) 미사 앞 한강은 옛날 미호(渼湖)  혹은 미호강으로 불렸던 곳.

   팔당을 지난 강물은 덕소에서 크게 휘어진후 수석산에 부딪치면서 미사 앞에서 강폭이 넓어지고 완만해지는데요.

   한강이 마치 호수처럼 넓고 경관 또한 매우 뛰어나니 팔당의 두미강처럼 미사 앞 한강은 미호라는 예쁜 이름을

   붙인 겁니다.

 

3) 특히 미사 앞 한강은 수운교통의 요지이자 민초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

    한강과 북한강, 남한강이 연결되므로 수운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고 물자를 운반하였는데,

    광주 분원에서 만든 왕실 백자가 이곳을 지났으며,  6.25 사변전만 해도 뗏목들의 통행이 아주 많았던 곳인데요.

    조선초에는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배를 타고 오대산에 다녀 오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다산 정약용이 능내에 있는 생가에서 한양의 궁궐로 분주하게 오가던 길이었습니다.

 

3) 미사 앞 한강에는 남양주와 광주를 잇는 "미음나루"가 있던 곳.

   이 일대의 큰 나루는 팔당의 도미진, 수석동의 미음진, 아차산 아래에 광진이 있었는데

    현재 음식점이 즐비한 풍속마을에 있던 미음나루는 남양주와 미사를 강 남북으로 연결하여 광주로 통하는 큰 나루였다고 합니다.

    미음나루는 규모가 상당히 커서 남한산성으로 군량미를 운반하고

    일반인의 통행은 물론 광주우시장에 오가는 소장수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합니다.

 

4) 수석산 동쪽 자락에는 유명한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있던 곳.

    석실서원은 1656년, 병자호란때 충신이었던 선원 김상용(金尙容,1561~1637), 청음 김상헌(金尙憲,1570~1652) 형제를 배향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원중 하나입니다.        

   "석실(石室)"이라는 명칭은 척화파의 거두로서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했던 김상헌의 별호입니다.

    석실서원은 평소 사림의 강학은 물론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는데 특히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산실로  큰

   역활을 수행해 왔다고 하네요.

   많은 세도가들이 드나들던 석실서원은 1868년, 대원군때 서원철폐령 이후 사라진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데 

   현재 서원터에는 민가가 들어섰거나 밭으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5) 또한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은거하던 "삼주삼산각"이 있던 곳.

   농암 김창협은 석실서원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서원 옆에 삼주삼산각(三洲三山閣)을 짓고 살며 후대 석실서원 학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요.

   삼주(三洲)는 그의 호에서 따온 것으로 삼산각 앞에 있는 한강변에 3개의 모래밭이 있어 붙은 이름이며,

   삼산각(三山閣)은 그가 지은 사랑채 이름이라고 합니다.

 

6)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은 석실서원이 배출한 진경산수화의 대가.

   석실서원이 배출한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은

   미사 앞 한강의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석실서원"과 "삼주삼산각" 그림 2점을 그려 경교명승첩(간송미술관 소장)에 남겼습니다.

   그만큼 이 일대는 경기 인근에서 가장 경관이 좋기로 손꼽히던 곳이었지요.

 

7) 조선 초기의 문신인 조말생(趙末生, 1370~1447)의 묘소와 신도비가 서원터 뒷산에 있습니다.

   묘가 위치한 곳은 우리나라 8대 명당중 하나라고 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변 경관은 단연 최고!

   이렇게 조망이 뛰어나니 석실서원이 들어서고,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남긴 겁니다.

 

 

 

* 미사리에서 바라보이는 수석동의 수석산(해발 81m).

산은 낮지만 전략적 요충지에 있어 삼국시대때 백제가 쌓은 수석리토성이 정상에 있지요.

 

 

* 덕소에서 바라본 수석산 풍경.

덕소 앞을 흘러간 한강은 크게 휘며 강폭이 넓어지고 완만해져 미호강이라고 불렀답니다.

오른편으로 보이는 마을(석실마을, 조은마을)에는 석실서원이 있어 많은 유생들이 오가던 유서깊은 곳이었지요.

 

 

* 안동 김씨의 세거지로서 많은 유생들을 배출했던 석실서원은 대원군때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진후

지금은 농경지로 사용되거나 주택이 들어선 모습.

 

 

* 석실서원은 사라졌지만 뒷동산에서 비라보는 한강변 경관은 최고수준!

심신을 수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유생들이 이 언덕에 올라 미호강의 비경을 즐겼을까요!

 

 

* 최고의 명당터에 위치한 조선초의 문신 조말생 묘소.

 

 

* 수석산 정상부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수석리토성.

조망이 뛰어나 삼국시대 이래 전략 요충지로 중요시 되었지요.

 

 

* 겸재 정선이 1741년 미호강에서 수석산을 바라보며 그린 "석실서원".

그림이 다소 과장되었지만  그림 왼편의 아름다운 강언덕 위에 나무에 가려진 석실서원과 초가 몇채가 보이네요.

석실서원의 모습을 확인할수 있는 유일한 그림이라 더욱 가치가 큰것 같습니다.

 

 

* 겸재 정선이 미호강에서 수석산을 바라보며 그린 "삼주삼산산".

그림 중앙의 기와집이 농암 김창협이 말년에 은거하던 삼주삼산각이 아닐까요?

강가에 떠있는 돛단배와 아름다운 강변 정취가 실로 대단합니다. ㅎㅎ

 

 

* 미호강 주변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