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20(화) 수원팔색길 7코스, 효행길 12.3km를 걸었습니다.
7색 효행길은 정조대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현륭원을 참배할때 왕래하던 길!
정조는 왕으로 즉위한 이후 총 13차에 걸쳐 원행(능행길)에 나섰다고 하는데 재위기간을 고려하면 매년 한 차례씩은 방문한 셈이지요.
주요 코스는 지지대고개~효행공원~미륵당~노송지대~만석공원~장안문(북문)~화성행궁~팔달문~매교역~세류역~장다리천2교까지 12.3km.
효행길을 걸으며 노송지대, 만석거, 화성행궁을 답사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고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읽을수 있는 무척 유익한 길이었습니다.
정조의 원행길은 그동안 여러 차례 재현된 적이 있어 한양에서 화성행궁, 세류역까지는 정조로를 따라 비교적 명확하지만 세류역 인근 부터는 경로가 모호한 실정입니다.
행궁을 나서면 당시 설치한 매교(梅橋),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황교(皇橋), 옹봉(甕峰), 대황교(大皇橋) 등의 표석을 따라 원행길이 이어졌는데
추정해 보면 매교에서 수원천을 건넌 후 상류천, 하류천을 따라 걸었으며 황교에서 다시 수원천을 건넌 후 응봉을 경유, 대황교에서 황구지천을 건넌 것으로 보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황교, 응봉, 대황교는 현재 수원비행장 안이기 때문에 정확한 흔적은 확인이 어려운 실정이며, 옹봉은 어느 정도의 산인지는 몰라도 비행장 건설때 사라진것 같습니다.
1795년 윤 2월의 원행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 반차도를 보면 사람이 1,505명, 말이 516필이지만
그림에 생략된 인원까지 합치면 사람이 1,807명, 말이 796필이 되었으며 행사에 동원된 전체인원은 사람이 5,661명에 말이 1,417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 정도의 인원이 열을 지어 행차하려면 최소한 폭 10m 이상의 넓은 도로가 있었을텐데 비행장 시설이 들어서며 옛 원행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네요.
효행길을 마감한 후에는 수원자전거인 타조(TAJO)를 빌려 타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황교 옛터를 확인하였습니다.
대황교(大皇橋)는 정조가 능행길에 건너 다니던 큰 돌다리여서 유명했지요.
대황교가 있던 자리가 어디인지 무척 궁금했는데 확인해 보니 옛터는 권선구 대황교동 138번지, 황구지천에 있었으나 1970년대 비행장 확장으로 인해 옛 터가 비행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더군요.
1960년대에 찍은 대황교는 비록 수해로 무너진 상태였만 일부가 남아 있어 1970년에 남은 석재를 융릉 안으로 옮길수가 있었고 현재 융릉에 가면 원대황교란 돌다리를 만날수 있습니다.
매교, 옹봉은 아예 확인자체가 불가능하지만 대황교 옛터는 부근에서 위치를 짐작할수 있었으니 작은 위안을 삼아도 될 일인데,
효행길을 마무리하려니 웬지 가슴 한켠에 아쉬움이 남네요.
화성행궁(華城行宮)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행궁과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습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힌 반면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뤘으며 1796년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습니다.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1911년 부터 일제에 의해 병원(자혜의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건물이 파괴되어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
1966년부터 발굴조사 자료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바탕으로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을 마쳤으며 2016년 부터는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과 복원을 진행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