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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봉산 영우원터, 휘경원터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2. 1. 7. 18:18
2022.1/7(금) 동대문구 휘경동에 위치한 배봉산과 영우원터, 휘경원터를 답사하였습니다.
배봉산은 중랑천 서쪽에 위치한 낮은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동대문구를 대표하는 명소.
배봉산 자락에는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의 영우원(永祐園),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의 휘경원이 있었지요.
효자였던 정조가 평생에 못다한 효도를 한다며 날마다 부친의 묘소를 향해 배례하게 되면서 배봉산이라는 산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는 잦은 기행으로 인해 영조의 명으로 27세때 뒤주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지금으로 부터 260년 전의 사건이지요.
동대문구 휘경동 29-1, 삼육서울병원이 있는 자리는 사도세자를 처음 안장한 수은묘(垂恩墓)가 있던 곳인데
수은묘는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영우원(永祐園)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789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광무 3년(1899)에는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면서 융릉(隆陵)으로 승격된바 있습니다.
영우원을 화성으로 이장한 후에는 배봉진(拜峰鎭)을 설치하여 터를 보호하였다고 하는데 일제때 빈터로 방치되다가 1936년 경성요양병원을 시작으로 서울위생병원이 들어섰으며
2009년 삼육서울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영우원터에서 지척인 휘경동 286-66, 휘경중학교가 자리한 곳에는 휘경원(徽慶園)이 있었습니다.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경우궁(景祐宮) 수빈박씨(綏嬪朴氏, 1770~1822)의 묘소였으나 1855년 남양주 순강원 옆으로 옮겼다가 1864년 다시 현재의 남양주 진접읍 부평리로 이장되는 곡절을 겪은바 있습니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일은 휘경원 조성시에 쓰인 석물은 영우원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는 "휘경원 원소 석물은 영우원을 옮길때 묻어 둔 옛것을 다듬어서 쓰라"고 순조가 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우원 석물(혼유석, 장명등, 문관석, 망주석 등)은 수원으로 이장할 때에 모두 땅속에 묻어 두었다는데 60년이나 지난후 며느리인 수빈박씨의 묘를 조성할때 다시 꺼내 사용한것 이지요.
휘경원이 이장된 후 빈자리로 남아 있던 옛터에 1907년, 헌종의 후궁인 순화궁(順和宮) 경빈김씨(慶嬪金氏, 1831~1907)의 묘가 마련되었습니다.
헌종은 경빈김씨를 총애하여 후궁에게는 이례적으로 창덕궁 내에 낙선재와 석복헌을 지어 하사하였다고 하나 요절하는 바람에 후사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경빈김씨의 묘자리가 최근 휘경동의 휘경원 옛터로 밝혀진바 있으니 수빈박씨의 묘자리를 경빈김씨가 다시 이어받은 거지요.
경빈김씨 묘는 1949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고 그후 일대가 주택지로 개발되며 휘경중학교가 1970년에 개교되었다고 하니 1960년대 까지도 묘터는 남아 있었던것 같습니다.
휘경원터를 다시 정리하자면
1823~1855년,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묘.
1907~1949년, 헌종의 후궁인 경빈김씨의 묘.
그런데 묘가 이장한 후에도 휘경원의 재실이 1980년대 이후 까지도 남아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그때 재실을 답사하지 못한 실수가 아직까지도 큰 후회로 남아 있는데 다시 시간을 내어 재실이 있던 위치라도 확인하고자 하였지만 증언을 해줄 사람을 아직 찾지 못한 실정.
1949년, 경빈김씨의 묘가 서삼릉으로 이전하였으니 석물의 일부는 당연히 옛터에 남아 있어야 하겠지만 휘경중학교 신축시 산비탈을 깎어내고 석축을 쌓는 대규모 토목공사로 말미암아 모든게 사라지고 말았네요.
경빈김씨의 묘는 불과 70여년 전의 일인데도 먼 과거처럼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졌음은 무척 아쉬운 일이 아닐수 없네요.
향후 언젠가 땅속에 있던 석물이 발견되어 뉴스꺼리가 될지 모르겠으나 현재로선 오직 남은 휘경동이라는 지명에서 옛 역사를 유추해 볼 따름입니다.
오늘은 영우원터, 휘경원터를 살펴보기위해 동대문구에 위치한 배봉산을 찾았습니다.
2022년, 임인년 새해를 맞이한 배봉산 풍경.
배봉산은 동대문구 전농동, 휘경동에 있는 산으로 산세가 완만하고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동대문구를 대표하는 명소.
잘 조성되어 있는 배봉산둘레길은 무장애길 4.5km로 산책하기에 아주 좋더군요.
둘레길은 이미 걸은적이 있으므로 오늘은 일단 산정상을 찾기로.
근래 군부대를 이전한후 잘 정비되어 해맞이장소로 인기만점인 배봉산 정상부.
근래 군부대를 이전한후 잘 정비된 산정상부.
이곳은 중랑천 일대를 살필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여서 고구려가 보루를 쌓아 방비하였으나 군부대가 들어서며 유적은 대부분 훼손된 상태.
서쪽으로 조망되는 서울 중심부.
동쪽으로 조망되는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능선.
둘레길 4.5km가 최근 잘 조성되어 산책하는 시민들로 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배봉산.
북쪽의 등산로를 걸어 삼육서울병원 방향으로.
휘경동 너머로 바라보이는 북한산과 천장산.
경희대 뒷산인 천장산 아래에는 경종이 잠들어 있는 의릉이 있지요.
배봉산을 내려오는 도중, 삼육서울병원 조금 못미쳐에 있는 휘경원터 안내문.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묘인 휘경원이 현재 휘경중학교 자리였음을 말해주고 있네요.
휘경원터 안내문 바로 아래에는 영우원터 표석.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이 당초 삼육서울병원 본관이 있는 자리였으나 1789년 화성으로 이장한 후 그 자리에 배봉진(拜峰鎭)을 설치하여 터를 보호하였다는 내용.
그러나 영우원터에 현재 삼육서울병원 본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내용은 위치가 너무 높고 풍수지리상으로도 맞지않아 의구심.
표석 뒷면에는 1968년 서울위생병원신축부지 조성공사중 어제묘지명(御製墓誌銘)이 발견되었다는 내용.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수 밖에 없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옛날 영우원이 있었던 삼육서울병원(동대문구 휘경동 소재).
산에서 내려와 병원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영우원 옛터를 찾아 보기로.
지형으로 볼때 전면의 에덴동산부터 영우원이 시작되었을듯.
에덴동산을 중심으로 병동이 배치된 삼육서울병원 안내도.
에덴동산은 삼육서울병원의 중심부이고 둘레에 낮은 능선이 감싸고 있어 이곳부터 영우원의 홍살문이 있고 참도가 시작되고 정자각이 있었으며 묘는 언덕을 이루는 산후조리원 부근으로 추정.
1968년 영우원터에 묻혀 있던 돌상자가 간호학교신축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조선일보 기사.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첫번째 무덤 영우원(永祐園)
휘경동(徽慶洞) 뒷산서 발견(發見)
<조선일보> 1968년 11월 21일자
20일 뒤주에 가두어 굶겨죽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 21대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의 첫번째 무덤이었던 영우원(永佑園, 永祐園의 잘못)터가 발견되었다. 이날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29의 1번지 서울위생병원 뒷산 간호학교신축지를 닦다가 지하 5m지점에서 돌상자(길이 1m, 폭 50cm, 높이 75cm) 두 개를 발견, 열어보니 그 돌상자 속에 납석으로 된 상자가 또 있었고 그 안에 상아쪽에 쓰인 천릉문(遷陵文)이 적혀 있었다.
왕조실록에 보면 영조 38년(1762년)에 죽은 세자는 중랑천 위 배봉산에 묻었다가 그 후 수원 융릉(隆陵)으로 이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봉분(封墳)을 하지 않았기에 그 장소를 몰랐던 것이다.
이날 이 출토물을 보고 고증한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김상기(金庠基) 박사는 동 공사장이 사도세자의 천릉 전의 능인 영우원임을 확인하고 왕릉을 옮기는 제도연구에 최초며 귀중한 자료로서 뜻이 있다고 말하였다.영우원을 화성으로 이장한 후에는 배봉진(拜峰鎭)을 설치하여 옛터를 보호하였다고 하는데 일제때부터 빈터로 방치되었는데요.
옛터에는 1936년 경성요양병원을 시작으로 서울위생병원이 들어섰으며 2009년 삼육서울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네모난 화강암.
영우원 당시의 유구로 추정되는데 크기는 1.2mx0.6mx0.4m이며 현재 녹지의 장독대 받침으로 쓰이고 있는 실정.
영우원 천장시 묻었던 돌상자가 발견되었던 삼육간호학교(현 삼육보건대학교) 자리.
그러나 정조실록에 의하면 "왕은 부장품들을 정자각 동쪽에 나아가 모조리 태우도록 명하고 증옥함을 비롯한 묘지명과 석물들을 내청룡 밖에다 묻어 버리고 따로 표시하라 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의 부장품들이 1968년 발견된 것이니 초장지와 부장풍 발굴지는 같은 위치가 아님을 알수 있으며
초장지는 부장품이 출토된 곳에서 서쪽으로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 곳으로 생각됩니다.
에덴동산 윗쪽이며 보건대학교 바로 옆의 산후조리원에서 그 뒷편이 초장지였을 것으로 추정.
주변을 샅샅이 둘러봐도 주춧돌 등 당시의 영우원 유구가 전혀 발견되지 않으니 무척 아쉬운 일!
산후조리원과 혈관혈액힐링센터 뒷편으로 마치 묘의 활개처럼 능선이 둥그렇게 둘러처져 있는 모습.
사진 하단의 네모난 구조물은 우물(샘)을 막은 덮개라고 하니 영우원 당시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음은 주택지를 걸어 휘경원 옛터를 찾아 갑니다.
영우원터와 휘경원터는 지척의 거리!
휘경중학교는 휘경원의 옛터가 있던 곳.
학교 화단에 휘경원터 임을 말해주는 작은 안내판이 있네요.
휘경원은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경우궁(景祐宮) 수빈박씨(綏嬪朴氏, 1770~1822)의 묘소였으나 1855년 남양주 순강원 옆으로 옮겼다가 1864년 다시 현재의 남양주 진접읍 부평리로 이장하는 곡절을 겪은바 있습니다.
휘경원이 이장된 후 빈자리로 남아 있던 옛터에 1907년, 헌종의 후궁인 순화궁(順和宮) 경빈김씨(慶嬪金氏, 1831~1907)의 묘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경빈김씨의 묘자리가 최근 휘경동의 휘경원 옛터로 밝혀진바 있으니 수빈박씨의 묘자리를 경빈김씨가 다시 이어받은 거지요.
특기할만한 일은 휘경원 조성시에 쓰인 석물은 영우원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는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는 "휘경원 원소 석물은 영우원을 옮길때 묻어 둔 옛것을 다듬어서 쓰라"고 순조가 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빈김씨 묘는 1949년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고 그후 일대가 주택지로 개발되며 휘경중학교가 1970년에 개교되었다고 하니 1960년대 까지도 묘터는 남아 있었던것 같습니다.
학교 안을 살펴보았지만 역시 옛 유구는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오직 휘경동이라는 지명만 전해지고 있는 실정.
내친김에 휘경원터와 접해 있는 서울시립대학교까지 방문.
동대문구 전농동, 배봉산 서쪽에 있는 서울시립대학교는 1918년 경성공립농업학교를 시작으로 하여 1987년 종합대학교로 승격.
사진의 경농관은 일제때인 1937년에 세워진 단층의 붉은 벽돌 건물로 학교의 오랜 역사를 말해 주네요.
배봉산을 걸어 영우원터, 휘경원터를 답사하고 서울시립대학교까지 둘러보며 오늘 일정을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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