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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도호부 관아, 부평향교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2. 2. 3. 09:23
인천시 계양구에 위치한 부평도호부 관아, 부평향교를 답사하였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계양산 아래 계산동에는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가 있어 현재의 계양구가 당시에는 부평의 중심지였습니다.
부평도호부는 1413년 부터 오늘날의 인천시 계양구, 부평구, 부천시, 서울 구로구 일부지역을 관할하였으며 1895년 갑오개혁으로 지방행정제도가 개편된 이후 인천부에 편입된바 있습니다.
관아 건물들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숙종 3년(1677)에 중수했다고 합니다.
원래 부평도호부에는 동헌 외에 객사, 동서 삼문, 근민당(近民堂), 좌우 익랑,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 등 총 23동 238칸의 웅장한 규모였습니다.
1909년 부평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도호부는 사라졌지만 현재 학교 안에는 당시의 관아(官衙) 1동과 정조의 체취가 남아 있는 욕은지(浴恩池), 어사대(御射臺)가 남아 있지요.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원래 ㄱ자 형태였으나 1968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ㅡ자 건물로 개조되었다고 하며 부사가 거주하던 내아(內衙)로 추정됩니다.
부평도호부에서 가까운 언덕에 부평향교(인천시유형문화재 제12호)가 있습니다.
부평도호부가 흔적만 남기고 있는 반면 부평향교는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다행스럽네요.
국립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 부평지역의 교육을 담당하던 부평향교(富平鄕校)는 고려 인종 2년(1127) 창건되어 당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수주향교(樹州鄕校)라 하였으나 고려 충선왕 2년(1310) 부평부가 되면서 부평향교가 되었습니다.
원래의 향교는 1636년, 병자호란때 모두 소실되었으나 숙종 14년(1688) 재건한바 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세워졌다고.
홍살문과 외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로 이루어진 교육공간이 있고 뒷쪽에는 사당인 대성전과 동·서무로 이루어진 제사공간이 있습니다.
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로 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인 기능을 사라졌으며, 봄·가을에 석전을 거행하고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불현듯 머리에 스쳐가는게 있네요.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 일제는 철저하게 우리 민족에 대한 말살정책을 추진했는데요.
특히 왕궁을 비롯하여 도호부 등 행정기관의 건물들, 행궁 등 산성의 건물 등 국가존립에 관련된 시설은 악랄하게 철거하고 소멸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지요.
반면 성균관, 향교 등의 교육기관은 대체로 강제 철폐만은 면하였는데 이는 오랜 우리 민족문화와 유교적인 관습을 손댈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평도호부, 부평향교를 둘러보면서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다시한번 상기하려니 이 원수를 언제 갚을지 몸이 부들부들~~!!
계양산 아래에 위치한 인천시 계양구를 찾아 갑니다.
오늘은 계양구에서 부평향교, 부평도호부 관아, 계양산성을 답사할 계획.
계양산 아래에 위치하여 역사 깊고 근래 크게 발전한 인천 계양구.
인천부평초등학교 자리는 조선시대까지 부평도호부가 있던 곳.
계양산 남쪽 자락에 부평도호부(富平都護府)가 있어 현재의 계양구가 당시에는 부평의 중심지였습니다.
부평도호부는 일제때 부평초교를 설립하면서 대부분 철거되어 사라지고 현재는 학교 귀퉁이의 옹색한 터에,
일부만 남아 있는 부평도호부 옛터와 관아1동, 욕은지, 어사대, 선정비, 은행나무 등.
모아놓은 부평부사 선정비들.
역대 부평부사들의 선정비를 모아 일렬로 세워 두었는데 예전에는 계양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눈에 익은 민태호(閔台鎬) 선정비.
민태호(1834~1884)는 조선 후기의 척신이며 민씨 정권의 요인으로 부평도호부 부사를 역임하고 후에 총융사, 어영대장, 대제학을 역임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때 경우궁으로 입궐하다 참살당한바 있습니다.
비석은 1875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한 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네요.
부평도호부의 여러 건물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관아 1동과 욕은지.
관아(官衙)는 원래 ㄱ자 형태였으나 1968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면서 ㅡ자 건물로 개조되었다고 하며 인천시유형문화재 제2호.
현재는 부평도호부전시실로 사용중.
초라하게 남아 있는 부평도호부의 욕은지.
연못에 남아 있는 욕은지(浴恩池) 각석.
연못 보수를 하면서 각석이 낯선 모양으로 변해 버렸네요.
정조가 활을 쏘았다는 어사대(御射臺).
정조 21년(1797) 정조가 김포 장릉을 참배하고 부평을 경유하여 사도세자가 묻힌 화성 현륭원에 행차길에 부평도호부에 들렸는데,
당시 어사대에서 활을 쏘고 욕은지에서 손을 씼었다고 전해집니다.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부평도호부의 부침을 생생히 지켜본 노거수이니 바라보는 아픔이 크네요.
부평도호부 자리였던 부평초교를 방문.
1909년 부평도호부를 철거하고 학교를 세웠으니 역사가 100년이 넘었네요.
일제는 조선을 멸망시킨후 행정기관의 흔적마져 지우기 위해 건물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소학교를 세웠지요.
다른 곳에도 터가 많을텐데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의 정기와 역사를 없애기 위한 일제가 저지른 일련의 행동에 분이 풀리지 않네요.
이 원수를 언제 갚으리오~~!!
교정에서 바라본 은행나무와 부평도호부 관아.
계산동 은행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수령이 500여 년이며 부평도호부와 역사를 함께 한 인천시기념물 제11호.
학교 안에서 바라본 부평도호부 관아와 욕은지 전경.
당초 학교 안 서쪽에 있었으나 1968년 동쪽의 현재 위치로 옮긴 모습입니다.
교사 앞에 있는 수령 600여 년의 은행나무.
역시 부평도호부의 부침을 생생히 지켜본 노거수지요.
부평도호부 관아의 옛 모습.
총 23동 238칸의 웅장한 규모였으나 100여 년전에 부평초교를 지을때 대부분 철거되어 사라졌지요.
부평초교에 남아 있는 부평도호부 관아의 옛 모습(1966년 항공사진).
사진을 보면 관아가 원래 학교의 왼쪽(서쪽)에 있다가 1968년 동쪽으로 옮겨졌음을 알수 있으며 학교 정문이 있는 동쪽의 도로망은 현재와 변함없는 모양입니다.
부평도호부 관아에서 계양대로를 건너면 부평향교(2008년 항공사진).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의 행정중심지에 향교가 꼭 있었지요.
인천 계양구에 있는 역사 깊은 부평향교.
하마비 옆의 홍살문을 들어서면,
부평향교의 외삼문(정문).
부평향교는 앞쪽에 배움공간인 명륜당, 뒷쪽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구조.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明倫堂).
유생들이 사서오경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곳.
명륜당은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하는 것은 모두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히는 것이다' 라는 뜻이라니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같습니다.
명륜당 옆으로 들어가면,
명륜당을 지나면 동·서재(東·書齋)에 다소 넓은 마당.
명륜당과 동·서재는 경학공간, 내삼문을 지나면 대성전과 동·서무는 제향공간.
동·서재(東·書齋)는 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기숙사로서 일반적으로 동재에는 양반자제, 서재에는 평민자제들이 기거했다고.
당초 공자 등 중국의 성현들을 배향하던 대성전(大成殿).
현재는 중국 5성(공자, 맹자, 증자, 자사자, 안자), 송조 2현(정호, 주희), 우리나라 명현 18인(설총, 안향,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기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의 위패를 모신채 봄가을로 제사를 올린다 함은 무척 부끄러운 일~~!!.
최치원 등 우리나라의 명현 18인의 위패를 모시던 동·서무(東·西廡).
1949년 전국 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각 향교의 동무와 서무에 모셔져 있던 우리 명현의 위패를 대성전에 모시기로 결정하여 현재 동·서무는 비어 있는 상태.
대성전 옆에 있는 향나무 노거수가 부평향교의 오랜 역사를 대변해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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