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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도(喬桐島) 화개정원과 화개산전망대, 교동읍성강바람의 국내여행 2023. 11. 20. 21:25
오랜만에 강화 교동도를 찾았습니다.
교동도는 임진강과 예성강이 흘러드는 한강의 끝지점으로 바다와 만나는 합류점에 위치하고 있지요.
예전엔 강화읍보다도 북한이 가까워 연백을 생활권으로 삼았다고 하며 뱃편도 나름 편리했다고 하나 6.25 사변 이후 모든 왕래가 단절된 역사가 있지요.
교동도의 인구 상당수가 가까운 북한 연백, 개성에서 피란나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리움과 한숨속에 늘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기를 고대하였으나 70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 1세대 실향민을 거의 고인이 되셨다고 하네요.
교동도를 찾은 이유는 최근 개통한 화개산전망대에 오르고 싶어서지요.
10여년전 교동면사무소에서 1시간 가까이 걸어 올라 화개산 정상에서 북녘땅을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전망대가 들어서다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화개산 북쪽 자락에 화개정원이 조성되었네요.
많은 자금을 투자, 멋진 정원을 조성하여 많은 관광객을 끌어드리는데는 성공했다지만 잘 있던 산림을 없애는 자연훼손이 불가피했으니 가슴 한 켠에 아쉬움도.
화개산전망대에서 바라본 드넓은 교동평야~!
경지정리가 잘 되어 있고 강화군에서 1인당 경지면적도 가장 넓다고 합니다.
농경지가 바둑판처럼 구획정리가 잘 되어 있다는건 바다를 메꾸었다는 뜻인데 원래 교동도는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 등이 있는 3개의 섬이었다가 간척사업으로 인해 큰 섬이 된 역사가 있지요.
고려때부터 조선시대까지 활발한 간척사업으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으니 우리 선인들의 피땀어린 노고가 얼마나 컷을까요!
노고에 깊히 감사드립니다.
오랜만에 강화 교동도를 찾아 갑니다.
강화도와 교동도를 연결하는 교동대교.
예전에는 강화도 창후리선착장에서 교동도 월선포로 배를 타고 들어 갔었지만 2014년 교동대교 개통으로 더이상 배를 탈 일은 없어졌지요.
먼저 찾을 화개산.
교동도를 찾은 이유는 화개산 정상에 세운 전망대에 오르고 싶어서지요.ㅎㅎ
화개산 북쪽 자락에 최근 조성된 화개정원.
연산군유배지 등 잘 조성된 화개정원.
전망대는 화개정원 위의 산 정상에 있는데 모노레일을 타고 올라가는 대신 구경하며 등산을 하기로.
연산군유배지로 알려져 10여 년전 답사한 적이 있었고 화개산에도 올랐었는데 그땐 산길을 걸었다면 지금은 화개정원 안을 걷는 실정.
연산군은 31세에 쫓겨나 화개산 아래에서 실의에 빠진채 유배생활을 하다가 64일 만에 죽었다고 하네요.
화개산에 오르다가 뒤돌아본 화개정원과 멀리 북녁땅.
모노레일을 타고 오를수도 있지만 걷기로.
그런데 예전에 화개산엔 2번이나 올랐었지만 이렇게 가파른줄 몰랐네요.ㅎㅎ
화개정원 안내도.
많은 자금을 투자, 멋진 정원을 조성하여 많은 관광객을 끌어드리는데 성공했다지만 잘 있던 산림을 없애는 자연훼손이 불가피했으니 가슴 한 켠에 아쉬움도.
화개정원 경사길을 숨가쁘게 걸어 오르면 화개산전망대.
드디어 화개산(華蓋山, 260m) 정상!
10여년전 교동면사무소에서 1시간 가까이 걸어 올라 화개산 정상에서 북녘땅을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전망대가 들어서다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일단 전망대는 합격점~!
교동도와 한강 하구, 북한 연백, 개풍군이 시원스레 바라 보입니다.
화개산전망대에서 바라본 드넓은 교동평야.
좌측이 수정산, 우측이 율두산.
바둑판처럼 구획정리가 잘 되어있다는건 바다를 메꾸어 농경지를 만들었다는 뜻이지요.
교동면사무소와 그 위로 율두산과 삼선리, 무학리, 지석리 방면의 평야와 농촌마을들.
6.25 사변때 북녘의 연백 사람들이 많이 피란와서 살았다는 교동도.
실향민의 아픔이 무척 큰 곳이지요.
교동면 산선리, 인사리 방면.
고려때부터 끈질긴 간척사업으로 3개의 섬이 연결되어 지금의 교동도라는 큰 섬이 되었다니 우리 선인들의 피땀어린 노고가 얼마나 컷을까요!
노고에 깊히 감사드립니다.
고구저수지 방향인데 한강 너머로 북한의 연백평야와 예성강이 바라 보입니다.
이곳은 옛날 교동도에서 가장 외진 곳이었는데 교동대교 개통으로 교동도의 관문이 된 느낌.
남쪽에 바라보이는 교동도 읍내리와 바다 건너 석모도 상주산.
화개산에서 내려와 다음 찾은 곳은 북녘이 가까운 북쪽 해안.
북쪽해안의 철책선 바로 앞까지 넓은 농경지가 펼처진 교동도.
철책 너머가 한강이고 강만 건너면 북한이지만 철책 자체가 남방한계선인 교동도 북쪽 해안.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2~3km 정도로 가깝다 보니 헤엄쳐서 교동도로 탈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 곳이지요.
북쪽을 향해 들어선 농촌마을.
남방한계선에 있는 접경지역이지만 평화스럽게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마을이네요.
다음 찾은 곳은 교동읍성.
교동읍성은 인조 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하면서 쌓은 성이며 둘레가 870m 이고 동남북 3곳에 성문이 있었으나 유량루만 복원된 상태.
1921년 폭풍우로 문루가 무너져 육축만 남아있다가 2017년 복원된 교동읍성의 유량루(庾亮樓).
육축의 무사석에 새겨져 있는 '南樓(남루)' 글씨.
예전엔 정식이름인 유량루 대신 남루라고 불렀나 보네요.
성곽 위에서 바라본 주위 풍경.
간척사업으로 논이 만들어져 지금은 바다와 좀 떨어져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성문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을것 같네요.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똑같은 모습의 교동읍성과 읍내리 민가모습.
화개산을 품고 있는 읍내리 교동읍성 안 마을풍경.
빈터로 남아 있는 교동읍성 안 교동부(喬桐府)터.
조선 인조 7년(1629)에 남양 화량진에 있던 경기수영을 이곳으로 옮기고 이후 교동현이 교동도호부로 승격되어 설치한 관아건물터.
관아와 객사를 비롯하여 내아, 외아 등의 관청건물과 안해루, 삼문루 등의 누각이 설치되어 조선시대 일반적인 지방관아의 형태를 따르고 있었다고.
쓸쓸히 남아 있는 교동부의 정문인 안해루의 장주형초석.
현재 교동부터는 쓰레기만 쌓여 있는 실정~!
최근 교동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데 유적지가 무관심에 방치상태이니 관에서 좀 더 신경을 써서 관리했으면 합니다.
빈터에는 돌계단이 남아 있어 아래, 위에 여러 건물들이 있었음을 증명.
옛날 교동부터의 아래, 위에 여러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니 배치를 알수 있는 옛 그림과 안내판을 세우는 성의도 필요해 보입니다.
교동부 아래에 있는 황룡우물.
조선 태종때 우물 안에 큰 황룡이 나타나 조선왕조실록에 까지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우물이지요.
다음은 역사를 품은 동진포(東津浦)를 찾았습니다.
뻘에 묻혀버린 동진포 옛 석축나루터.
교동읍성 남쪽해안에 있는 동진포는 인조 7년(1629)교동에 영(營)이 설치되어 읍성이 축조된 후 사용되었던 포구로 서울, 인천, 해주로 통하는 관문이었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하정사신(賀正使臣)이 교동도에 와서 해로의 일기를 살핀후 서해로 나갔으며 사신들의 임시숙소인 동진원(東津院)이라는 객사가 있었다고.
동진포에서 바라본 강화도.
교동팔경중 하나로 교동송객(喬桐送客)이라 하여 이곳에서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광경이 볼만했다고 하는데 모두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네요.
동진포에 있는 가게에 들려 교동쌀, 순무도 사고 뜨신 차도 마시며 정담을 나누니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ㅎㅎ
인물도 좋고 의젓하게 생긴 동진포 양양이~!
마지막으로 찾은 월선포.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만해도 강화도 창우리선착장과 연결되는 뱃길이 있어 가장 붐비던 포구였지만 뱃길이 끊긴 이후 쓸쓸해진 모습.
월선포에서 바라본 교동대교.
강화읍에서 교동도까지 4차선 도로가 개설되고 2014년 교동대교까지 개통되면서 교동도는 더이상 접경지역의 외로운 섬이 아니라는 생각.
월선포에 있는 평화자전거길 안내도.
강화나들길은 엄두조차 내기 어렵지만 교동도를 자전거로 한바퀴 도는 30km 회주길이라도 조만간 달려야 겠습니다.ㅎㅎ
월선포에서 강화도 창후리선착장을 바라보며 교동도 여행을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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