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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환자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고흥 소록도(小鹿島) 탐방강바람의 국내여행 2024. 5. 4. 20:18
20여년만에 소록도(小鹿島)를 찾았습니다.
소록도하면 한하운 시인의 애절한 '전라도길'이 생각납니다.
한여름 황톳길을 걸어 소록도를 찾아가는 아픔을 시로 승화시켜 많은 감동과 눈물을 흐르게 한 적이 있었는데요.
예전에는 한센병환자를 나환자, 혹은 문둥이라고 불렀으며 내가 사는 고향에서는 용천백이라고 하여 어린애들이 가장 무서워하기도 했지요.
도대체 문둥병은 어떤 병인지, 왜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얼굴도 흉하게 되는지, 소록도는 어디에 있는지, 그들은 어떻게 감옥같은 삶을 살아갔는지 등 한센병에 대한 두려움이 대단히 컷던 기억이 납니다.
소록도는 고흥의 남쪽 끝에 있는 작은 섬으로 어린 사슴을 닮아 붙은 이름이며 거주인구는 약 600명 입니다.
1916년 가장 외진 작은 섬에 소록도자혜병원으로 설립된 후 소록도갱생원, 국립나병원 등으로 여러 이름을 거쳐 오늘의 국립소록도병원에 이르고 있는데요.
일제는 1935년 나예방령을 제정한 후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한센병환자들을 소록도에 강제수용한채 생활하고 치료받게 하였지요.
말이 치료지 이들에 대한 학대와 인권유린은 말로 형용할수 없었습니다.
소록도 중앙공원도 한센인의 피와 눈물로 탄생한 공원입니다.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인들이 강제동원되어 1936년에 착공하여 1940년에 완공하였으며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관상수를 반입하여 식재하였습니다.
소록도를 살펴보려니 얼마나 많은 한센인들이 고향을 떠나 먼 오지의 섬에서 강제노역과 학대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며 격리생활을 했을지 가슴이 아프네요.
한하운 시인의 전라도길을 읽으며 그들의 크나큰 고통, 희생과 애절한 삶에 늦게나마 위로를 드립니다.
전라도길(소록도로 가는 길) / 한하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 지까다비 - 작업화
고흥 녹동항에서 소록도를 바라봅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 건너편의 소록도로 들어 갔었지요.
2009년 준공된 소록대교를 건너 편하게 소록도를 방문하기로.
오랜만에 찾은 소록도.
3년전에 찾았다가 코로나로 폐쇄되어 들어가지 못했으나 지난 4월초부터 다시 개방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니 실제로는 20여년만의 방문이라 감격적 ~!
아름다운 솔밭은 슬픈 사연이 깃든 수탄장(愁嘆場).
과거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를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병원에서는 감염을 우려하여 환자 자녀들을 직원지대에 있는 보육소에서 생활하게 하였으며 , 병사지대의 부모와는 이 경계지역 도로에서 한달에 한번 면회를 허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자녀와 부모는 도로 양편으로 갈라선채 눈으로만 혈육을 만나야 했기에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 불렀다고 하네요.
소록도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는 장흥 제암산(806m).
푸른 득량만 너머로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는 장흥의 산들이 무척 아름답기만.
잘 조성된 해안데크길.
예전에는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에 들어와 언덕을 넘고 도로를 따라 걸었던 추억이 있지요.
한센병 환자를 위해 평생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펼쳤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나라 한센병 퇴치와 계몽에 큰 기여를 할수 있었습니다.
섬 전체가 울창한 산림과 바다가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소록도.
그동안 큰 건물(박물관)이 들어서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네요.
처음 맞이하는 '애한의 추모비'.
1945년 해방 이후 환자들이 자치권을 요구하자 갱생원직원과 한센인간에 폭력사태가 발생하였는데 당시 희생된 한센인 84명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
국립소록도병원은 1916년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소록도자혜병원으로 설립된 후 소록도갱생원, 국립나병원 등 여러 이름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먼저 찾은 중앙공원.
오른쪽에 있는 검시실과 감금실은 나오면서 보기로.
아름다운 소록도 중앙공원.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인을 강제동원되어 1936년에 착공하여 1940년에 완공하였으며 처음엔 '부드러운 공원'으로 불렀다고 하며,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관상수를 반입하여 식재하였다고.
수목원을 방불케 하는 소록도 중앙공원.
광복후 소록도 중앙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72년 공원을 확장한 역사가 있다고.
마카엘 대천사가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를 적은 구라탑(求癩塔).
1963년에 건립하였고 구라(求癩)는 '한센병은 낫는다' 라는 뜻이니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어온 탑입니다.
구라탑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누어진 공원은 한쪽은 한국의 정원, 다른쪽은 일본식 정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센인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고 잘 관리해 주시어 훌륭한 공원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중앙공원에 있는 스오 마사에스 원장 동상터와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를 새긴 반석.
반석에 새긴 한하운(1919~1975) 시인의 보리피리.
보리피리/한하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 인환(人寰) - 인간의 세계. 기산하(幾山河) - 세상과 단절하여 방랑하며 지내는 곳.
스오 마사에스 원장 동상터.
1933~1942년까지 9년 동안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환자들을 학대하고 강제노역에 내몰았으며 강제징수한 기금으로 동상까지 세운 악명 높은 일본인 원장.
저 위에 동상이 있었으나 태평양전쟁 물자로 징발되었다고.
이춘상 6.20의거 기념비.
1942년 일제는 갱생원 시설확장과 태평양전쟁 물자생산을 위해 한센인을 강제로 노역에 동원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므로 이춘상 의사가 악명을 떨치던 스오 마사에스 일본인 원장을 칼로 처단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22년 늦게나마 한센인 항일운동가 이춘상 의사를 재평가하고 기념비를 세울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송화.
어릴때 어머님이 송화가루로 만드신 떡을 맛있게 먹던 추억도 있지만 최근엔 알레르기로 사람들이 기피하는 실정.ㅎㅎ
한센인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하여 절망에서 희망을 만들어 낸 소록도성당.
1935년 공소설립후 1960년에 본당으로 승격하였고 1961년에 현재의 성당을 신축한 역사가 있으며 2016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
한센인들을 포근히 감싸주는 평화스런 안식처네요.
다음 찾은 곳은 소록도갱생원 감금실.
으시시한 감금실은 한센병 환자를 불법적으로 감금했던 시설로 인권유린의 현장.
감금실과 나란히 있는 검시실(해부실).
사망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과 유해를 보관하는 영안실로 구성되어 있지요.
사망한 환자들을 해부하던 검시대.
한세인은 3번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첫째는 발병으로 인한 사회적인 죽음, 둘째는 죽은 후 시신을 해부하는 일이며 세번째는 장례 후 원치않는 화장을 하는 것이라고.
한센인들이 사는 병사지대로 가는 길.
옛날에 학교였을법한 건물도 보이고,
한센병환자들이 사는 동네인 병사지대.
환자들의 일상생활 보호를 위해 외부인은 출입할수 없는 곳이지요.
2016년 개원 100주년을 맞아 개관한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소록도 한센인의 삶과 역사를 알수 있는 한센병박물관.
얼마나 많은 한센인들이 고향을 떠나 먼 오지의 섬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격리생활을 했을까요!
그들의 크나큰 고통, 희생과 애절한 삶에 늦게나마 위로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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