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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남문 안 비석들강바람의 유적답사 2024. 8. 15. 14:47
남한산성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어 주목되는데요.
이는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 수어청(守御廳)을 두었을뿐만 아니라 광주부(廣州府)의 읍치(邑治)까지 있어 유수, 수어사들이 근무했기 때문입니다.
남문을 들어서면 길가에 8기, 그 아랫쪽에 30기를 모아둔 것이 보이며 이외에도 산성 안에는 비석들이 여럿 보이는데 조선 후기의 역대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들의 공덕을 기린 비석들이지요.
아래쪽에는 원래 19기가 있었는데 행궁 복원시에 11기를 옮겨와 30기를 현재처럼 ㄷ자 형태로 배치한바 있습니다.
비석의 이름은 여럿이어서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공을 기리는 선정비(善政碑),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떠나도 생각하겠다는 거사비(去思碑), 자기네를 아끼고 사랑해줬다는 애휼비(愛恤碑), 이별하기 아쉬워 눈물을 흘린다는 타루비(墮淚碑) 등이지요.
선정비를 비롯한 비석들은 대부분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세운 것이기에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요.
조정에서는 이를 알고 선정비를 금하도록 수차에 걸쳐 지시도 하고 모조리 없애버리기도 했지만 19세기 이후 국정이 문란할때 다시 전국적으로 많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참고로
남한산성은 외침에 대비한 국가적 요충지였기에 수어청(守御廳)을 두었을뿐만 아니라 광주부(廣州府)의 읍치(邑治)가 위치한 군사,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남한산성의 군사행정은 수어사(守御使)가 책임지고 일반행정은 부윤(府尹)이 맡는 체제였으나 혼란이 야기되자 1682년(숙종 8) 부윤을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도록 한바 있지요.
행궁(行宮)은 전란시에는 왕이 피난와서 머물지만 평상시에는 광주부 읍치로 사용되어 광주유수겸 수어사의 직무공간이었으니 지금으로 보면 행궁에 광주시청이 있고 광주시장이 근무했다는 얘기인데요.
대한제국 시절인 1906년에는 광주부에서 광주군으로 변경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는 산성 안에 있던 광주군청이 광주면 경안리로 이전한바 있습니다.
선정비 등 비석들은 원성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문화유산으로 간주하여 잘 관리되었으면 합니다.
오랜만에 찾은 남산산성 ~!
오늘은 남문을 통해 남한산성 안으로 진입합니다.
남문을 들어서니 좌측으로 선정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쪽에 선정비가 많은 이유는 당시에는 남문이 산성으로 통하는 주통행로 였지 않았나 추측이 되네요.
얫 사진 - 남한산성 안쪽에서 바라본 남문과 선정비들.
옛 사진 - 남한산성 안의 선정비들.
남문에서 행궁 방향으로 옛 길을 따라 경사면에 줄지어 서있는 선정비들.
남문 안쪽에 있는 8기의 선정비들.
유수겸수어사김공병기영세불망비(留守兼守御使金公炳冀永世不忘碑).
1867년에 세운 비석으로 유수겸 수어사인 김병기(金炳冀, 1818~1875)는 영의정 김좌근의 양자로 요직을 거친 인물이며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은 그의 양아들이라고.
한때 몰락한 왕족으로 파락호인 흥선대원군과 교류하며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어 후에 안동김씨가 대부분 숙청되었을 때에도 살아남을수 있었다니 앞을 보는 안목이 대단한것 같습니다.
유수겸수어사민공영목영세불망비(留守兼守御使閔公泳穆永世不忘碑).
민영목(閔泳穆, 1826~1884)은 1883년 전권대사로 한미, 한영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인물이며 박영효, 유길준과 함께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간하였으나 민태호, 민영익, 민응식과 함께 이른바 사민(四閔)체제를 구축, 권력의 핵심인물로 부각되어 1884년 경우궁으로 입궐하다가 살해되었으며 또한 서예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라고.
아랫쪽에 있는 선정비들.
과거 남문과 행궁을 이어주던 옛길이 지나던 곳이지요.
원래 19기가 있었는데 행궁 복원시에 11기를 옮겨와 30기를 현재처럼 ㄷ자 형태로 배치한바 있습니다.
남한산성 비석군 표지판.
역대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들의 공덕을 기린 비석으로 앞면에는 비석명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건립시기가 새겨져 있다는 설명.
흥선대원위대감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大監 永世不忘碑).
1862년에 남한산성 9개 사찰에서 세운 흥선대원군(1820~1898)을 위한 비석으로 무슨 연유로 세우게 되었는지 의문입니다.
막강하던 흥선대원군의 권력이 이곳 남한산성까지 미쳤나요?
겸유수수어사민공치구영세불망비 (兼留守守御使閔公致久永世不忘碑).
민치구(閔致久, 1795~1874)는 읺녀왕후의 생부인 민치록의 후손으로 민승호의 아버지이며 흥선대원군의 장인이자 고종의 외할아버지.
흥선대원군 덕에 공조판서로 특진하였고 다음해인 1865년에 공주부유수가 된바 있으며 1974년 폭탄테러로 아들 민승호가 사망하자 그 충격으로 병사했다고.
유수겸수어사김공이재거사비(留守兼守御使金公履載去思碑).
김이재(金履載, 1767~1847)는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중심인물.
유수겸수어사김공윤식영세불망비(留守兼守御使金公允植永世不忘碑).
1888년에 세워진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비석으로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할때 영선사로 학생과 기술자 28명을 인솔하여 중국 텐진에 간바 있으며 그곳에서 북양대신 이홍장과 7차에 걸친 회담을 마친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바 있으며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때에도 청나라에 구원요청하기도 했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일제의 작위를 받는등 반민족행위자였습니다.
유수겸수어사조공두순선정비(留守兼守御使趙公斗淳善政碑).
1851년에 세워진 조두순(趙斗淳, 1796~1870)의 비석으로 흥선대원군 집권 초기에 영의정이 되어 경복궁 재건과 대전회통 편찬, 삼군부 설치 등을 지휘한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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