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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근대역사길 5코스(덕수궁의 중심)를 걷다강바람의 유적답사 2024. 7. 2. 08:52
'정동 근대역사길 역사보행탐방로' 5코스(덕수궁의 중심)를 걸었습니다.
5코스는 덕수궁~서울광장~환구단~ 서울시청을 둘러보는 정동 근대역사길 역사보행탐방로의 마지막 코스입니다.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는 과정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대한제국 황실의 중추기관이 세워졌던 터와 공간들이 자리해 있습니다.
황궁이었던 경운궁과 정문 대한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방사형 도로와 광장,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식이 열렸던 환구단, 영빈관으로 쓰인 대관정 등을 통해 대한제국의 탄생과 근대국가를 향한 시도와 흔적 등을 살펴볼수 있지요.
또한 서울시청사에서는 지하에서 2009년 시청사 건립도중에 조선시대 무기제조기관읜 군기시 유적이 발견되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볼수 있습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는데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퇴위한 후 태황제 고종의 궁호를 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는 의미로 덕수(德壽)라 하였으며 이때부터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 후기까지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이 없었는데요.
1896년, 아관파천으로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고종은 추락한 위신을 만회하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하여 덕수궁을 지었는데
고종은 아관에 머물면서도 덕수궁에 전각짓는 일을 지휘하였고 공사가 완료될 즈음 급기야 1897년 아관을 떠나 덕수궁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와함께 덕수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터에 환구단(圜丘壇)을 지었습니다.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인데요.
고종이 1987년 2월에 덕수궁으로 돌아온 이후인 1897년 10월2일, 자주독립국인 대한제국의 탄생을 세계만방에 선포하면서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냈으며 1899년에는 3층의 8각 황궁우를 축조하고 신위판을 봉안하였습니다.
그러나 1913년 일제에 의해 3층의 원형제단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철도호텔(현 웨스턴조선호텔)이 들어서면서 면적이 크게 축소되어 현재 황궁우와 석고 그리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대문, 정문이 남아 있을뿐입니다.
한편 인근 소공동에는 1898년 부터 황실의 영빈관으로 쓰던 대관정(大觀亭)이 있었는데 1904년 일본군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들어섰다가 이후 경성부립도서관 해방 이후 남대문도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지요.
덕수궁에는 대부분의 전각들이 1900년까지 완공되었고 1902년엔 돈덕전이 지어졌지만 1904년에는 일제의 만행으로 추정되는 큰 불이 나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는 참화를 당했는데요.
화재 이후 덕수궁 복원공사는 즉시 시행되어 1906년까지 즉조당, 석어당, 준명당, 함녕전, 양이재, 중화문, 대한문 순서로 다시 지어졌으며 1910년에는 대규모 서양식 석조건물인 석조전이 건립되었습니다.
결국 덕수궁을 연달아 2번이나 지은 셈이니 이에따른 막대한 국고지출로 인해 대한제국을 침몰케하는 큰 원인이 되지않았는지 생각케 되네요.
1919년 고종황제가 운명하자 일제는 기다렸다는듯이 덕수궁의 전각들을 무참히 헐고 궁역은 매각되거나 공공건물이 들어서며 잠식되었는데요.
덕수궁은 훼손될대로 훼손되어 황궁으로서의 존엄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는데 근래 돈덕전이 복원되고 선원전 영역의 복원공사가 착수되니 늦었지만 무척 다행스럽다는 생각입니다.
덕수궁을 바라보며 마지막 5코스를 시작합니다.
5코스 (대한제국의 중심) 안내판을 보면
"5코스는 대한제국 황실의 중추기관이 세워졌던 터와 공간들이 자리해 있다.
황궁이었던 경운궁과 정문 대한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방사형 도로와 광장,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식이 열렸던 환구단, 영빈관으로 쓰인 대관정 등을 통해 대한제국의 탄생과 근대국가를 향한 시도와 흔적 등을 살펴볼수 있다."
5코스는 덕수궁~서울광장~환구당~옛 미문화원~서울시청~서울도시건축전시관까지 약 0.8km 거리이나 덕수궁을 둘러봐야 하므로 약 2km 이상 걸어야 하는 탐방길.
먼저 덕수궁을 둘러 보기로 ~!
덕수궁을 방문할때마다 침통하고 애처로운 생각이 많이 드는데요.
색칠한 부분이 잠식된 본래의 덕수궁 영역.
1897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대한제국의 으뜸궁궐이 된 덕수궁.
이미 각국 공사관과 선교사 주택들이 들어선 상태이기 때문에 궁역을 확장하기 어려워 땅모양이 불규칙하게 된것으로
마치 미국, 영국, 러시아공사관이 덕수궁 궁역 안에 밀고 들어와 있는것 처럼 보입니다.
일제때 전각들이 대거 민간에 매각되거나 철거되고 또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궁역이 축소되어 현 덕수궁은 옛날의 1/3에 불과한 실정.
덕수궁 정전인 중화전(中和殿).
1902년 중층으로 높게 중화전을 지었지만 1904년 화재로 소실된후 1906년 단층으로 중건된 모습으로
원래 중화전 영역에는 정방형으로 행랑이 둘러처져 있었으나 일제때 철거된 이후 아직 복원이 않되는 실정.
왜 아직도 복원을 하지 않는지 국가유산청의 변명도 듣고 싶고 반성을 촉구합니다.
덕수궁 광명문(光明門).
함녕전의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30년대 중화문 서남쪽으로 옮겨져 자격루, 흥천사 동종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된 적이 있었지요.
2018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좌우의 행각이 복원되지 않아 덩그러니 매우 낯선 모습.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고종황제의 침전으로 1907년 강제퇴위후 주로 생활하다가 돌아가신 비운의 건물이기도 하지요.
1897년 건립되었으나 1904년 아궁이에서 시작된 불로 덕수궁 전체가 소실되었으며 1906년 다시 복원되었는데요.
1919년 고종이 별세한 이후 이곳을 빈전과 혼전으로 사용한바 있습니다.
덕수궁 덕홍전(德弘殿).
을미사변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시신을 모실 빈전과 신주를 봉안할 혼전으로 사용하고자 건립하였으며
1904년 화재로 소실되고 1912년에 재건된 이후 고종황제를 알현하는 편전으로 이용된바 있습니다.
유일한 2층 목조건물인 석어당(昔御堂).
중화전 뒷편에 있는 석어당은 1층이 정면 8칸 측면 3칸,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매우 아름다운 전각.
석어당 이름은 '옛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때 선조가 피난길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와 16년간 거처하던 곳이며,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이 건물 앞뜰에 꿀어앉힌채 죄를 책한 곳이기도.
단청을 하지핞아 소박한 살림집처럼 보이는 석어당.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석어당을 침전으로 사용한바 있으며 현재의 모습은 1904년 화재로 불타서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석어당에서 바라본 왼쪽의 준명당, 오른쪽의 즉조당,
준명당(浚明堂)은 고종이 업무를 보던 편전이며 외동딸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이 되기도.
즉조당(即祚堂)은 인조가 이곳에서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여 붙인 이름으로 고종이 중화전 건립 이전에 임정전으로 사용한 건물이며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1904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다시 지은 건물.
준명당 앞에서 바라본 즉조당, 석어당 모습.
즉조당 현판은 고종황제의 글씨.
덕수궁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세운 서양식 석조건물로 영국인 건축가 하딩이 설계하였고 1910년에 완공하였으며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을 줄지어 세우고 중앙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습니다.
오호, 지난해 준공개방한 돈덕전 ~!
돈덕전(惇德殿)은 '고종 즉위 40주년(1902)기념 칭경(稱慶, 축하의 의미)예식'의 서양식 연회를 위해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신축한 서양식 건물로서
칭경예식을 국제행사로 성대하게 거행하여 서구열강을 대상으로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고 아울러 중립국가 승인을 요청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콜레라창궐과 러일전쟁의 시작으로 실패하고 말았는데요.
돈덕전은 고종 승하 이후 방치되었다가 덕수궁의 권역이 점차 축소되고 공원화되기 시작하면서 1933년 이전에 훼철된것으로 보입니다.
돈덕전은 고종황제가 각국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고 연회을 열었으며 1907년 순종황제가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 합니다.
건물 곳곳에 있는 오얏꽃 문양이 웬지 쓸쓸해 보이네요.
돈덕전의 실내 모습.
정확한 고증으로 복원되었는지 불투명하다지만 그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짝짝 ~!
시청광장을 걸어 환구단을찾아 갑니다.
일제때까지만 해도 시청광장 대부분이 덕수궁 권역이었다고 하지요.
태평로가 개설되고 또 확장되고 또 시청광장이 조성되면서 궁궐 면적이 대폭 축소된겁니다.
서울시 옛 청사와 2012년 새로 지은 신청사.
국가등록문화재인 옛 청사는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성부청사로 건축되어 사용하다가 광복후에는 서울시청사로 사용되던 건물.
르네상스 양식의 기본틀을 갖추면서도 대지형태에 맞춘 합리적인 배치, 개방형 사무공간, 수수한 외관 등 역사주의 건축양식에서 근대주의 건축양식으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신청사 신축으로 인해 2008년 부터 2012년 까지 내부와 외관 일부를 변경하였으며 현재 서울도서관과 전시관으로 이용중.
6월 더위가 장난이 아니여서 아이들은 벌써 분수에서 물놀이중.ㅎㅎ
덕수궁을 바라보는 위치로 옮겨온 천제단 정문.
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 남쪽의 소공로변에 있다가 철도호텔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는데 1960년 말에 철거된후 한동안 소재를 모르다가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에서 발견되어 옮겨왔다고 합니다.
불과 몇십년전의 일인데 이렇게 역사기록도 없고 정보교류도 없었는지 문화재 행정이 기가 막힐 노릇.ㅎㅎ
1899년 신위판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3층의 8각 황궁우(皇穹宇).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하면서 중국, 일본과 대등한 황제의 위용을 과시하는 동시에 서구를 향해 독립국가임을 천명했던 정치적, 역사적 의미가 컷던 곳이지요.
일제때 환구단을 찍은 흑백사진.
왼편에 황궁우와 석조문이 보이며 중앙의 둥근건물은 환구단으로 이 자리에 철도호텔(현 웨스턴 조선호텔)이 들어 섰지요.
덕수궁과 환구단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생각하니 혈압이 오르고 몸이 부르르 떨리네요. 나쁜 xx들 ~~!!
원형이 잘 남아 있는 3개의 아치를 가진 석조문.
환구단에서 황궁우로 올라가던 석조대문으로 남쪽부터 정문, 환구단, 석조대문, 황궁우 순으로 배치되어 있는 모습.
섬세하게 조각되어 설치된 환구단 답도.
답도의 쌍용과 해치가 황제의 권위를 말해주는것 같습니다.
하늘에 제사지내던 신성한 공간이 고층빌딩에 둘러싸인채 조선호텔의 정원 역할을 하고 있으니 심기가 매우 불편.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석고단.
석고(石鼓)의 몸체에 새긴 용무늬는 조선 말기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고.
을지로에서 만난 옛 미문화원.
1938년 일본기업중 하나인 미쓰이물산(三井物産)의 경성지점으로 신축된 건물이었으며 20여년간 미대사관으로 쓰이다가 1968년 세종로에 있는 현재의 건물로 옮겼으며 이후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되었지요.
1990년 미국이 서울시에 소유권을 넘겨 시청별관으로 사용하다가 2015년에는 리모델링을 거쳐 그레뱅뮤지엄으로 개관하기도.
안전진단결과 위험시설물로 판정되어 현재 폐쇄중.
다음은 서울시청사를 방문.
서울시청사 지하에 조성한 군기시(軍器寺) 유적전시실.
군기시는 조선시대 무기를 제조하던 관청으로 1884년에 폐지되었다고.
2009년 시청사 건립도중에 군기시 유적이 발견되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볼수 있지요.
군기시 관련 건물터와 호안석축 등의 발굴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청사 지하1층 모습.
서울시청사 건립시 근대와 조선시대에 조성된 호안석축, 건물터 등의 유구와 자기, 동전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고 보물로 지정된 불량기자포를 비롯해 총통, 철환 등의 조선시대 무기들도 발견되었다고.
군기시 유적지에서 발굴된 정릉동천 호안석축.
정동과 덕수궁에서 흘러나온 정릉동천이 서울광장, 서울시청 을 거쳐 청계천으로 가는 물길의 호안석축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이 일대의 지대가 무척 낮았는데 복토하여 지금의 모습이 된것 같습니다.
군기시 보물, 불량기자포.
불씨를 손으로 점화하여 발사시키는 화기로 1호 건물터에서 출토되었으며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유물로 판단되어 보물 제861-2호로 지정.
시민을 위한 시설로 잘 꾸며져 있는 서울시청사 시민청.
옛 청사 앞에 걸린 대형글판을 보면서 올 여름은 좀 더 여유를 갖고 지내고자 합니다.
"더위를 핑계삼아 늘어져도 괜찮은 날, 여름".'강바람의 유적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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