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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구한 최고의 영웅,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을 만나다강바람의 유적답사 2024. 7. 26. 11:34
조선을 구한 최고의 영웅, 한음 이덕형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운길산 아래 사제마을에는 한음이 말년에 지내던 별서터가 있고 강건너에 가까운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는 한음의 묘와 신도비가 있는데요.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1613) 선생은 능력과 덕망을 겸비한 조선 중기의 명신으로 왜란을 극복하고 왜란후 민심을 수습했으며 당쟁을 조정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신 난세의 영웅입니다.
호(號)를 한음(漢陰)으로 한 것은 광주이씨이므로 한강 북쪽에 있는 한양(漢陽)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한강의 남쪽 땅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입하자 한음은 외교관으로서 일본장수를 만나 그들의 잘못을 따져 물었고 협상에 실패하자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 설득하여 파병을 하도록 했으며 조명연합군이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지요.
한음은 광해군때 영의정을 지내는 등 나라의 중요한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과 어머니 인목대비를 내쫓으려할 때 이항복과 함께 이에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북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용진(龍津)의 사제마을에서 머물며 나라를 걱정하다 병으로 별세하였습니다.이때 오성 이항복은 무척 슬퍼하며 직접 염습을 할만큼 끝까지 우정이 각별했습니다.
이덕형 선생은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설화로 더욱 유명하지요.
오성은 오성부원군 이항복(李恒福,1556~1618), 한음은 한원부원군 이덕형(李德馨,1561~1613)입니다.
이들은 어려서 부터 둘도없는 친구로 지내면서 장난이 심하고 기지가 뛰어났고 같은 해에 과거에 합격하여 나란히 벼슬에 올랐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왜군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조선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에 올랐지요.
다섯살이라는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눈 이들에 대한 수많은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신도비의 한 구절을 음미해 봅니다.
'知有國異不知有身(지유국이부자유신)' - 나라 있음을 알되 자신의 몸 있음은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나라와 백성을 위해 늘 노심초사하며 일생을 바친 한음을 다시 생각케 됩니다.
북한강변에 있는 한음 이덕형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먼저 운길산 아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2리에 있는 한음의 별서터를 찾아 갑니다.
예전에는 수종사에 가려면 지금과 길이 달라 송촌리 사제마을을 통해 운길산을 올라야 했는데요.
그때에 송촌리는 강가 용진(龍津)에 있는 사제(莎提)마을이라 불렸습니다.
한음 이덕형의 사제마을 별서터.
운길산 자락의 높은 언덕에 위치하여 집에서 한강의 용진나루와 수려한 산야를 바라볼수 있는데요.
1613년 당쟁의 여파속에서 병든 몸을 쉬게 하고자 낙향한 곳으로 백사 이항복, 송운대사, 박인로 등 당대의 귀인과 명인들이 찾아와 경치도 즐기고 나라를 걱정하며 우정을 나누던 곳입니다.한음은 낙향하기 훨씬 이전인 선조 33년(1605) 그가 45세 때로 부친을 봉양하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이 곳에 터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북한강 용진나루가 아래에 있어 언제든지 한양에 갈수 있는 교통이 무척 편리했던 이점이 있었지요.
현재 한음의 자취는 남아있지 않지만 한음, 오성의 우정을 생각하며 마당에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고결한 모습입니다.
근래 복원한 읍수정(挹秀亭) 정자.
한음은 이곳에 집을 지어 대아당(大雅堂)이라는 당호를 내걸었고 2채의 정자에는 이로정(怡老亭), 읍수정(挹秀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지요.은행나무 사이에 세워진 '이덕형 별서터' 비.
1611년 한음을 찾아온 노계 박인로가 한음의 심경을 그대로 읊은 사제곡(莎提曲)의 탄생지이기도.
한음의 대아당이 있을법한 자리에 들어서 있는 민가.
지금의 별서터는 너무나 실망스러우니 남양주시의 노력으로 인근 토지를 매입하여 주위를 정비하고 대아당이라도 복원되기를 기대합니다.
한음이 심었다는 400년 된 은행나무.
한음의 흔적은 모두 사라졌지만 함음이 심은 은행나무 2그루와 말을 타고 내릴때 사용하던 하마석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네요.
사제마을에서 동쪽의 청계산 자락을 바라봅니다.
동네 아래에 북한강 용진(龍津)나루가 있고 강건너에는 부인 한산이씨의 묘가 있어 늘 바라보며 그리워하곤 했지요..
다음은 북한강을 건너 한음의 묘와 신도비를 찾아 갑니다.
한음의 묘와 신도비가 위치한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
전면의 산 중턱에 한음의 묘, 가정천 개울 건너에 신도비가 있는데 옛날 중은사라는 절이 있어 중은동(中隱洞)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영의정 이덕형을 비롯하여 이준경, 정찬손 등의 묘가 모두 이 부근에 있으니 구정승골이라고도 불렸지요.
도로에서 개울을 건너면 이덕형신도비, 신도비에서 300m 떨어진 산 위에는 묘소.
사후 40년이 흐른 효종 4년(1653)에 세운 "영의정 문익공 한음신도비(領議政 文翼公 漢陰神道碑)".
일제강점기때 개울에 처박히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해방후 다시 세워진 역사가 있다고.
대제학 조경(趙絅)이 지은 한음의 신도비.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 1561~1613) 선생은 능력과 덕망을 겸비한 조선 중기의 명신으로 왜란을 극복하고 당쟁을 조정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신 난세의 영웅.
전면에 '영의정 문익공 한음(領議政 文翼公 漢陰)'이라고 써있는 제목글씨.
신도비 옆에 설치한 임진왜란때 한음의 활약상을 그린 만화.
짧은 내용이지만 조선 최고의 외교관인 한음 이덕형이 왜장수와 담판, 명나라에 원군요청 등 담력 높은 활약상을 잘 그리고 있네요.
한음의 영정각 가는 길에 만난 600여년 된 은행나무 노거수.
옛날에는 중은사(中隱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지만 절은 사라진채 은행나무 노거수만 옛 터를 지키고 있네요.
옛부터 한음의 묘소를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들리던 절이었을텐데 아쉽게도 부침의 역사를 알길 없네요.
근래 중은사 절터 앞에 세워진 대제학 조경(趙絅)이 지은 한음신도비명정서( 漢陰神道碑銘井序).
조경은 신도비에서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세 정승이 임진왜란을 당해 망해가는 나라를 서로 힘을 합쳐 중흥시켰다고 칭송하였습니다.
목왕삼거리에서 소나기마을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만나는 한음 영정각(재실).
앞에 있는 정려문(旌閭門)은 1592년 9월 피난중 왜군이 접근해오자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절한 부인 한산이씨를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웠다고.
한음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인 쌍송재(雙松齎).
안에는 당당한 풍채와 늠름한 모습의 한음 영정이 모셔져 있지만 문이 굳게 닫힌 실정.
영정은 후손들의 노력으로 400년 전 당시의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영정각 뒷편으로 묘소 가는 경사길.
한음 이덕형과 부인 한산이씨의 묘.
이씨는 1592년 임진왜란때 28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절하여 먼저 묻혔고 한음은 1613년 53세 나이로 별세하여 합장하였습니다.
묘표와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 상석 등이 갖추어진 한음의 묘소.
知有國異不知有身(지유국이부자유신)' - 나라 있음을 알되 자신의 몸 있음은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나라와 백성을 위해 늘 노심초사하며 일생을 바친 한음을 다시 생각케 됩니다.
'領議政文翼公漢陰李先生德馨之墓, 贈貞敬夫人韓山李氏祔左(영의정문익공한음이선생덕형지묘, 증정경부인한산이씨부좌)'라고 새겨진 묘표.
뒷편 윗쪽에 있는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어머니 문화유씨(文化柳氏)의 묘소.
한음이 아버지보다 5년 먼저 별세하였다는 안타까운 얘기.
묘소 뒷편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풍경.
구정승골 너머로 별서인 대아당이 위치해 있는 운길산이 잘 보이네요.
살아서는 대아당에서 부인 한산이씨의 묘를 바라 보았는데 죽어서는 말년을 보내던 대아당이 잘 보이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까요 ~!'강바람의 유적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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