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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혜음원(惠蔭院)터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9. 30. 20:44
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한 사적 제464호, 혜음원(惠蔭院)터를 답사하였습니다.
먼저 혜음령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이미 900년전, 고려때 지은 큰 시설이 있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네요.
고려 예종 17년(1122) 건설된 혜음원은 한곳에 원(院), 절(寺), 행궁(行宮)이 모여 있는 아주 특이한 경우!
건물배치와 출토유물이 개성의 고려 궁터인 만월대와 아주 유사해 고려시대 궁궐배치와 건물구조, 생활양식 등을 살펴볼수 있는 아주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원은 국립숙박시설로 출장중인 관원이나 일반 백성이 이용했다고 하며, 절은 사찰 본래의 기능 외에 원을 관리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고, 행궁은 왕이 개성에서 남경(서울)으로 가는 도중에 머물렀던 궁을 말하지요.
원, 절, 행궁이 같이 모여 있는 이런 모습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곳이 유일한 사례로 생각됩니다.
혜음원은 산능선을 계단식으로 깎아 11단의 건물터를 조성하고 37동 이상의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경사진 모습이 양주 회암사터와 흡사하나 회암사가 절과 행궁으로 이루어진 반면 혜음원은 원, 절, 행궁이 함께 있었음은 다소 기이하다는 생각입니다.
혜음원은 아래부터 위로 올라 가면서 원, 절, 행궁 순서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유구를 살펴보면
발굴기관에서 원터의 위치를 잘못 제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터라고 하는 곳을 살펴보면 관리나 백성들의 숙박시설로는 어울리지 않게 남아 있는 유구는 무척이나 섬세하고 화려합니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유구는 절과 행궁의 흔적으로 생각되며 원터는 그 앞쪽의 넓은 빈터가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그리고 혜음원은 언제, 무슨 사유로 소멸되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왜 이토록 철저하게 파괴되어 없어졌는지 이 점은 앞으로 명확하게 확인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혜음원을 답사하면서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네요.
현재 안내문을 보면,
《 혜음원터는 우암산 비호봉(328.6m)의 서남쪽 산줄기의 고갯마루인 혜음령에서 북쪽으로 1.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우암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려 온 능선의 남쪽 부분에 의지하여 터를 잡았기에 입구인 남쪽을 제외하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입지로 혜음원터에서는 광탄에서 혜음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잘 조망된다.
혜음원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東文選」과 「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문헌에서 기록으로만 확인되었으나, 1999년 동네 주민의 제보를 접한 동국대 학술조사단에 의해 「惠蔭院」이라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수습됨으로써 처음으로 그 위치가 파악되었다.
위 기록에 의하면 혜음원의 창건 배경 및 그 과정, 창건과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혜음원은 개경과 남경(서울) 사이를 왕래하는 행인을 보호하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혜음원의 창건시기는 고려 예종 15년(1120) 2월, 공사를 시작하여 동왕 17년(1122)년 2월에 완공되었는데 이때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도 축조되었다고 전한다. 두 기록으로 보아 혜음원은 고려 중기 개경과 남경 사이에 건립된 국립숙박기관이었으며 동시에 왕의 행차를 대비한 행궁(별원)의 역할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까지 확인된 혜음원의 규모는 11단의 건물터 내에서 총 33동의 건물터와 여러 조경시설들이 있고 면적은 약 3,000평이다. 하지만 혜음원이 자리잡았던 터임을 알려주는 기와와 토기편이 남쪽 주차장 뒷편의 논 일대와 북쪽 군부대 사격장 일대까지 확인되는 것을 볼때 사역의 범위는 이와 비슷할것으로 추정된다.
혜음원 건물터의 조성대지가 남서쪽으로 서서히 낮아지는 골짜기여서 지형을 따라 각 단마다 남쪽에 동서 방향으로 축대를 쌓아 평탄지를 조성한 후 건물터를 축조하였다. 이러한 입지적 상황으로 인해 건물터 북쪽에서 흘러 내리는 계류와 지하수를 단순히 배수가 목적이 아닌 조경의 요소로이용한 것은 혜음원의 특징이다. 》
위키백과에 의하면,
동문선(東文選) 권 64기 혜음사신창기(惠蔭寺新創記)는 혜음원의 창건배경과 그 과정, 창건과 운영의 주체, 왕실과의 관계등을 기록하고 있는 문헌이다.
이에 의하면 혜음원은 남경과 개성 간을 오가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위하여 고려 예종 17년(1122)에 건립된 국립숙박시설이며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別院)도 축조되었다고 전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혜음령이라는 명칭의 유래에서 그 위치가 추정되어 오다가 1999년 주민의 제보에 의해 행해진 조사에서 「惠蔭院」이라고 새겨진 암막새가 수습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2004년까지 지속적으로 발굴조사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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