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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국민 품으로(4) --- 칠궁(七宮)강바람의 국내여행 2022. 8. 3. 09:26
청와대 관람, 마지막 순서로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사적 제149호, 칠궁(七宮)을 답사하였습니다.
청와대와 맞닿아 있는 칠궁은 1968년 1/21 사태 이후 아예 접근조차 되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조금 완화되어 십여년 전에는 몇달전에 예약하여 어렵게 방문할수 있었으니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웠는데 근래에는 더 완화되어 방문하여 바로 비표만 달고 입장할수 있게 바뀌었지요.
금년 5/10 이후에는 아무 제약없이 자유롭게 입장이 가능해져 편하게 탐방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두 꿈같은 얘기지요.
현지 자료에 의하면,
「칠궁(七宮)은 근래에 와서 붙여진 명칭으로 조선시대에 왕을 낳은 일곱 후궁들의 신주를 모신 왕실 사당이다.
원래 이곳은 영조가 어머니 숙빈최씨를 기리기 위해 1725년(영조 1)에 지은 사당으로 처음에는 숙빈묘라 하였다.
이후 1744년(영조 20) 에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의 육상(毓祥)이라는 묘호를 올렸고, 1753년(영조 29)에 궁(宮)으로 승격하여 육상궁(毓祥宮)이 되었다. 영조는 재위기간중 200여 차례나 육상궁을 방문하였다.
조선 후기 도성 안에는 육상궁 외에도 왕을 낳은 후궁을 모신 사당이 여럿 있었다. 고종과 순종때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신주를 옮겼고, 1929년에 덕안궁을 옮겨 와서 육상궁에는 일곱 분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육상궁과 연호궁, 선희궁과 경우궁에는 각각 두 분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동쪽 육상궁 권역에는 나직막한 담이 둘러 싸고 서쪽 권역에는 네 개의 사당이 서로 접하여 서있다. 이 두 권역 사이에 냉천정과 냉천, 자연이라는 네모난 연못과 뒷쪽의 산자락이 어울려 한국식 정원의 원형을 이룬다.
이곳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당을 어떻게 짓고 운영했는지 알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며
여기에서는 매년 10월 넷째주 월요일에 칠궁제를 지낸다.」
왕의 어머니중에는 후궁이 많았습니다.
숙종, 영조, 정조의 정실왕비는 모두 왕자를 낳지 못했고
경종, 영조, 장조(사도세자), 순조는 왕비가 아니었던 어머니에 대해 평생 애틋한 정을 지닌채 살아야만 했습니다.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못한 후궁에 대해서는 각처에 사당을 지어 신주를 모셨는데요.
1908년(융희 2년) 일본 통감부의 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칙령 제50호에 따라 그해에 모두 육상궁 안으로 옮겨 합사했으며
마지막으로 1929년 덕안궁을 육상궁 안으로 옮긴 역사가 있습니다.
칠궁의 역사를 다시 살펴보면,
1725년, 경복궁 북쪽에 사당을 짓고 숙빈묘라고 부름.
1744년, 숙빈묘를 육상묘로 바꿈.
1753년,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승격.
1870년,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을 옮겨 옴.
1883년, 소실된 육상궁을 새로 지음.
1887, 1897년, 대빈궁, 선희궁이 옛 자리로 돌아감.
1908년, 대빈궁과 선희궁을 다시 옮겨오고 저경궁, 경우궁도 옮겨 옴.
1929년, 덕안궁을 옮겨 옴.
청와대 관람, 마지막 순서로 칠궁을 찾아 갑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도로를 개설하며 영역이 대폭 축소된 칠궁.
왼쪽에 보이는 담장까지가 대략적인 원래의 칠궁 영역입니다.
대통령집무실과 관저가 이전하였으니 원래의 칠궁복원도 가능해 보입니다.
칠궁(七宮)은 근래에 와서 붙여진 명칭으로 조선시대에 왕을 낳은 일곱 후궁들의 신주를 모신 왕실 사당입니다.
앞에 재실이 있고, 뒷편 중앙부에 냉천정이 있으며
냉천정 동쪽에 육상궁 연호궁, 서쪽에는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 배치된 모습.
원래의 칠궁은 이보다 훤씬 넓었지만 서쪽에는 도로개설로, 동쪽에는 청와대 영빈관 신축으로 땅이 잠식되어 무척 옹색해진 실정.
칠궁의 정문격인 외삼문.
서쪽에 도로개설로 땅이 잠식된 상태여서 모서리에 있는듯한 모습.
지난번에는 외삼문으로 통행했었는데 오늘은 재실의 정문을 통해 칠궁에 입장.
북악산 자락에 위치한 칠궁.
현재의 칠궁은 1908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당을 육상궁 안으로 모아 조성한 것입니다.
청와대 영빈관과 맞닿아 있는 칠궁의 재실.
재실은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입니다.
소박하면서도 크고 당당한 모습의 재실.
재실 중앙부에 걸려 있는 송죽재 현판.
재실 오른쪽에 걸려 있는 풍월헌 현판.
뒷쪽에서 바라본 재실.
왼쪽이 재실, 오른쪽은 안채인 삼락당(三樂堂).
영조가 육상궁에 거동하여 예를 올린 후에 삼락당과 풍월헌에서 신하를 접견했다고.
삼락당에는 박정권의 조치로 궁에서 내몰린 황실가족들이 살았으나 1979년 10.26 사건때 쫓겨 났으며 비둘기집을 부른 가수 이석도 마지막으로 칠궁에서 살았습니다.
이후 황실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렵게 살아 갔다고 합니다.
재실에서 바라본 칠궁이며 오른쪽은 육상궁으로 통하는 삼문.
주목, 향나무 고목이 그윽한 칠궁의 육상궁.
장중한 기단석 위의 육상궁 삼문.
육상궁, 연호궁의 감실과 신주 모습.
칠궁의 모태가 된 육상궁.
영조가 247회나 방문했다고 하니 정말 효심이 대단하네요.
육상궁, 연호궁이 함께 있는 육상궁.
육상궁은 영조의 모친 숙빈최씨의 신주, 연호궁은 추존왕 진종의 모친이자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의 신주를 모시고 있지요.
앞뒤로 걸려 있는 연호궁, 육상묘 현판.
연배 높은 분의 현판은 안쪽에 건다고.
영조의 어필인 육상묘 현판.
육상궁 현판은 고종때 화재로 소실되어 예전의 육상묘 현판을 걸어 두었다는 설명.
육상궁에서 바라본 서쪽의 냉천정 영역.
냉천정 뒷편엔 아름다운 정원과 초가정자.
냉천정 뒷편에 있는 냉천(冷泉) 샘.
냉천 북쪽의 장대석에는 재위 3년째가 되던 1727년 3월, 육상궁에 거동한 영조가 냉천의 맑은 물을 어루만지며 지은 오언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초가정자 아래에 냉천이 있고 수로를 통해 자연으로 물이 흘러가게 되어 있네요.
영조가 자주 찾아 쉬어가던 냉천정(冷泉亭).
육상궁이 처음 건립된 영조 초반에 지은 건물로 추정되며
서쪽 2칸은 온돌방, 동쪽 한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고 냉천정에는 영조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냉천정 현판은 영조의 친필.
냉천정은 지난해 대대적인 해체보수공사를 하여 서까래를 새로 끼워 넣은것이 보이네요.
냉천정 아래에 있는 자연(紫淵).
냉천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는 네모난 연못으로 화강암 장대석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한 모습이 그림같이 아름답네요.
자연에서 바라본 냉천정.
자연(紫淵) 글씨가 새겨진 연못의 화강암장대석.
냉천정을 바라보며 길게 자리한 수복방.
원래 육상궁에 딸린 시설이었으며 1753년 육상궁으로 승격할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
다음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당을 한곳에 모은 5궁을 볼 차례.
도로개설로 무척 옹색해진 덕안궁 영역에는 4채의 사당이 있는데요.
맨 앞에 덕안궁, 뒷쪽에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 배치된 모습.
저경궁, 대빙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의 감실 모습.
덕안궁은 영친왕의 모친이며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귀비엄씨를 모신 사당.
원래는 뒷편의 사당과 함께 나란히 있었지만 1968년 1/21 사태 이후 도로개설로 인해 억지로 옮겨진 상태.
덕안궁 뒷편의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서쪽에서 바라본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저경궁은 추존왕인 원종의 모친이자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의 사당.
대빈궁은 경종의 뫼친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의 사당.
경우궁, 선희궁이 같이 있는 사당.
경우궁은 순조의 모친이자 정조의 후궁인 유비박씨, 선희궁은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모친이자 영조의 후궁인 연빈이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선희궁과 경우궁이 합사되었으니 시할머니와 손주며느리가 같이 있은 모양새.
앞에 경우궁 현판, 안쪽에 선희궁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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