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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 불명산 화암사(花巖寺)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3. 4. 15. 08:06
2023.3/28(화) 전북 완주군의 화암사(花巖寺)를 찾았습니다.
꿈속에서도 가끔 뵈던 절이니 얼마나 걸음하고 싶었을까요!
이른 봄이라 아직 푸르름은 없지만 길가에는 수줍은듯이 피어있는 얼레지꽃이 절에 가는 나그네를 반겨주네요.
위험한 바위벼랑길을 걸어 20년만에 찾은 화암사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채 아늑하고 고요한 산중의 청정도량 그 자체네요.
절에 이르는 그윽한 숲길과 높다란 바위벼랑길, 성문을 연상시키는 우화루, 백제계 건축을 계승했다는 극락전, 전체적으로 고색창연한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우니 이런 절은 정말 보배중의 보배로 생각됩니다.
15세기에 쓴 「화암사중창기」에 의하면 극적인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요.
"절은 고산현 북쪽 불명산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진지 오래다. 비록 나무하는 아이, 사냥하는 남정네라고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렵다. 골짜기 어귀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내려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있으니 폭은 겨우 한 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이른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마리 말을 감출 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 둔 복된 땅이다."
적묵당 툇마루에 앉아 봄날의 화암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니 아늑함에, 온화함에, 또 고즈녘함에 절로 가슴마져 처연해지며
이만한 절은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색창연한 우화루, 극락전은 물론 극락전 안 부처님 위의 보궁형 닫집(천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워 숨이 멎을 정도인데 늘 잊지 않은채 살고 있음에도 왜 진작 찾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기도 하네요.
조만간 다시 시간을 내어 절 입구에 있는 요동마을에서 숙식하며 화암사의 진면목을 찬찬히 둘러 보고 싶네요.
그래도 오늘 작은 소원을 이루니 그동안 찾지 못했던 죄스러움이 조금은 풀리는것 같습니다.
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 불명산에 있는 화암사를 찾아 갑니다.
노거수가 늘어선 요동마을을 지나려니,
느티나무 고목이 반겨주네요.
고찰 화암사에 가려면 꼭 인사를 드리고 싶을 정도로 나이가 많고 늠름해 보이는 나무지요.
절 입구에 있는 싱그랭이 요동마을.
싱그랭이는 길손들이 쉬어가던 마을로서 주민들이 걸어놓은 짚신을 갈아신고 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니
예전에는 주막 등 쉼터가 있던 교통요지였나 봅니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예쁜 숲길을 걸어야.
예쁜 숲길을 걸으면 바위절벽이 우뚝~!
지금은 물길을 따라 철제계단이 놓여 있지만 옛길을 걷기로.
선인들은 바위벼랑길을 걸어 절에 다녔지요.
부녀자들이 난간도 없는 벼랑길을 걸어다녔으니 얼마나 힘들고 가슴 조리는 일이었을까요!
전국의 유명사찰은 거의 답사해 보았지만 절 가는 길이 이렇게 험한 곳은 처음 봅니다.
오랜 세월 이 길을 신도들이 걸어 다녔다니 정말 믿어지질 않네요.ㅎㅎ
옛길에서 바라본 완주군 경천면의 첩첩산중.
40여 년전에 놓은 철제계단.
가장 아름다운 고찰 앞에 철제계단이라니 보고 싶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네요.
다시 옛 모습을 찾는 날이 오기를 기원하며.
바위벼랑길을 걸어 올라서니 갑자기 나타나는 포근한 길.
이런 반전이 있나요~!
숨을 고르며 걸어가는 길이 다정하기만 합니다.
물이 졸졸 흐르는 한 여름에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고.ㅎㅎ
길가에는 수줍은듯 얼레지꽃이 활짝~!
오호, 화암사~~!!
흔한 일주문, 천왕문도 없이 처음 만나는 화암사의 소박한 모습입니다.
처음 맞이하는 화암사 우화루(보물 제662호).
조선 광해군 3년(1611) 세워진 건물로 꽃비가 흩날리는듯한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루각.
우화루 앞에 서서 두 손 모아 인사를 드리려니 왜 진작 찾아오지 못했는지 후회가 되기도 했는데요.
우화루 전면에 걸린 "불명산화암사" 현판.
소박한 모습의 현판도 그렇고 힘이 들어간 글씨체도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절 안은 우화루 옆 문간채의 작은 문을 이용해야 하니 익숙하지 않은 모습.
절에 들어가는 문이 이렇게 작을수가 있나요.ㅎㅎ
절마당에서 맞이한 안도현 시인의 "화암사, 내 사랑".
'잘 늙은 절 한 채'라는 싯귀가 화암사를 가장 잘 표현한것 같아 가슴에 와닿네요.
측면에서 바라본 우화루(보물 제662호).
잘 늙은 화암사의 첫 건물로 앞에서 보면 2층처럼 보이나 밑에 축대가 쌓여 막혀 있는 모습.
안마당애서 바라본 "우화루" 현판.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라니 이름도 예쁘지만 역시 꾸밈없이 소박한 모습의 현판이 정겹네요.
우화루에 걸린 목어.
화암사의 역사를 대변해주듯 곱게 나이먹은 모습이 화암사의 또다른 볼거리.
아름다운 우화루 내부 모습.
임진왜란 이후 다시 지었으니 4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고건축물.
튼튼한 골격을 이루어 힘있고 건장한 모습의 우화루.
화암사의 중심법당인 극락전.
10여년전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소중하고 단 하나뿐인 하앙식 구조를 갖춘 건축물.
아담한 크기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인 화암사 극락전.
처음에는 고려 후기에 지었으며 정유재란때 소실되어 1605년에 중수되었다고 하니 400년 역사가 넘는 소중한 고건축물.
특이한 모습의 극락전 현판.
한 글자씩 써서 붙인건 처음보는 사례로 전혀 꾸밈없이 소박한 모습.
건축학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극락전의 하앙구조(下昻構造).
하앙이란 기둥위에 중첩된 공포와 서까래 사이에 끼워진 긴 막대 모양의 부재를 가리키는데 이 하앙의 끝부분 위에 도리를 걸고 서까래를 얹으면 밖으로 돌출한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수 있다고.
알듯말듯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나 백제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에서는 화암사에서만 발견된다니 건축학도들에게는 국보중의 국보.
하앙구조는 해방 이후 건조물 문화재계 최대의 발견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는데 특이하게 건물 앞뒤의 모양새가 다른데요.
앞머리는 용두를 조각한 반면 뒷쪽은 단순한 모습으로 뵤족하게 다듬은 형태.
단정한 형태의 극락전의 옆 모습.
극락전의 뒷모습.
뒷면에 문이 3개 달린 특이한 모습인데 평소 안에 보관하던 괘불 등을 넣고꺼내는 용도이겠지요.
극락전 뒷편의 뾰족한 하앙 모습.
오호, 극락전 안에 모신 아미타불과 후불탱화, 닫집~~!!
아미타여래의 서방극락정토를 궁전처럼 장엄하게 표현한 닫집.
고색창연하고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질 않네요.ㅎㅎ
가장 화려하고 섬세하게 조성한 극락전 안 보궁형 닫집은 화암사의 가장 큰 볼거리.
부처님의 머리 위에서 똬리를 튼채 여의주를 희롱하는 황룡 한 마리와 좌우의 비천상, 극락조, 오색구름, 주위의 연꽃봉오리 등이 화려하게 장식된 모습.
제일 앞에 한쌍으로 조성되어 있는 귀여운 모습의 비천상.
동자 얼굴을 하고 있으나 비천상이라고 하는데 상서로운 극락세계에 들어온듯한 느낌을 줍니다.
단청이 오래되어 퇴색이 심한 극락전 천정.
닫집 주위의 퇴색된 단청이 무척 우아한 모습.
극락전 안에서 장엄한 불국토를 대하려니 밀려오는 진한 감동을 추스르기 어렵네요.
감사합니다.
불단에 조각된 꽃문양.
극락전 안 동종.
전언에 따르면 이 종은 임진홰란때 불에 타 광해군때 다시 만들었는데 밤이 되면 종이 스스로 울려 스님을 깨우고 자신을 지켰다고.
일제강점기에는 무기로 쓸 쇠붙이를 얻으려고 일본헌병대가 몰려오자 종이 스스로 울려 위험을 알렸고 스님들이 땅에 묻었다가 광복후에 꺼냈기에 보존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적묵당과 지붕이 맞닿아 있는것 처럼 보이는 우화루.
비좁은 마당을 연결하여 사용하려는듯 우화루 바닥과 높이가 비슷한 마당 모습.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적묵당(寂默堂).
ㄷ자형 평면에 뒷마당이 있고 앞에는 길다란 툇마루도 있어 친근한 느낌이 드는 건축물.
승방으로 쓰이고 있는 불명당(佛明堂).
아담하여 민가를 연상시키며 화암사의 다른 법당과는 조화가 않되는 모습.
한칸짜리 조촐한 모습의 철영재(啜英齊).
이 작은 건물은 뜻밖에도 조선 초기의 무신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다는데 철영(啜英)은 꽃부리를 깁다라는 뜻인데 불교에서는 '입을 삼가라'는 의미라고 하네요.
성달생은 성삼문의 조부로 조선 초기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질때 큰 돈을 시주했다고 하는데 그 이후 아들과 손자가 역모에 가담한 죄로 연좌당했다고.
언제 다시 화암사를 찾을수 있을까요~!
잘 늙은 절, 새집처럼 포근한 화암사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돌아가게 되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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