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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海美邑城)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3. 4. 29. 21:59
2023.4.12(수) 서산 해미읍성을 답사하였습니다.
해미는 천수만의 북쪽 끝에 있는 해안지역으로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지역이었는데요.
조선시대 서해안 방어의 군사요충지로 인정되어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을 이곳으로 옮긴바 있고 1421년(세종 3)에 해미읍성을 쌓았습니다.
1652년(효종 3)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현감이 겸영장이 되면서 충청도 5군영중 하나인 호서좌영으로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한바 있습니다.
해미읍성은 둘레가 1.8km, 높이가 5m, 옹성이 둘, 우물이 여섯개가 있으며 성 둘레에 탱자나무 울이 둘러져 있어 탱자나무성이라고도 불렀다고.
해미를 포함한 내포땅은 일찌기 선진문물이 빨리 전파되는 서해안 지역으로 18세기 말, 천주교인이 늘어남에 따라 순교자도 많았습니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에 이어진 박해때에는 이 지역 천주교인들이 해미영에 끌려와 1천 여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일부는 호야나무에 매달려 고문 당하거나 목매달려 죽기도 했으며 해미천에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기도 하고, 서문 밖에서는 돌다리에 자래기질쳐서 죽였다고도 하네요.
죽음도 불사하며 끝까지 천주교를 지킨 처절한 순교성지입니다..
해미읍성은 구한말에 폐성된 이후 읍성 안에 민가 수십여채와 학교가 들어서 큰 마을을 이루고 있던 시절도 있었는데요.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1970년대에 성공적으로 모두 철거,이전시킨후 동헌, 관아, 동문, 서문, 청허정 등을 순차적으로 복원정비한바 있지요.
그러나 휑하니 넓은 빈땅을 바라 보노라면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승주의 낙안읍성처럼 원래 읍성에는 관아와 민가가 함께 있기 마련인데 민가를 수용하지 않은채 모두 철거시켰음은 큰 아쉬움입니다.
오랜만에 찾은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고창읍성, 낙안읍성과 함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중 하나로 천수만을 끼고 있어 조선시대때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
해미읍성의 남문인 진남문(鎭南門).
홍예 위에 단층문루를 둔 진남문.
조선시대때 부터 원형이 잘 보전된 해미읍성의 정문이지요.
읍성을 돌출시켜 옹성을 쌓고 그 위에 설치된 망루.
평소에는 전방 관측을 하고, 전투시에는 방어를 용이하게 하게 하는 시설.
진남문 육축의 '황명홍치4년신해조' 각자.
황제의 명나라 홍치4년인 신해년(성종 22, 1491) 진남문을 축조하였음을 뜻하니 어언 500년이 넘었네요.
진남문을 들어서 동헌과 객사로 통하는 중앙길.
해미감옥 앞에 있는 600년 넘은 회화나무 고목.
회화나무의 충청도 사투리는 호야나무.
1866년 병인양요에 이어진 박해때 많은 천주교인이 끌려와 고문을 당하거나 목 매달려 죽기도 한 회화나무.
몇년전 복원된 해미영의 감옥.
충청도의 많은 천주교인을 끌어와 가두었던 해미영의 감옥.
그러나 감옥이 읍성 안의 중심지에 복원되어 있으니 당시의 정확한 위치인지는 글쎄요~~??
제법 규모있는 모습을 갖춘 동헌의 정문인 외삼문.
현판은 호서좌영(湖西左營).
병마절도사영에서 해미영이 된 후 충청도의 5개 영중 하나로 호서좌영이라고 했다고.
읍성의 중심지인 객사(客舍)와 그 뒷편의 내아(內衙).
객사는 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공식행사를 하던 곳이며 내아는 병마절도사나 현감의 살림집.
읍성의 동헌(東軒).
동헌에는 병마절도사를 비롯하여 현감 겸 영장이 근무하며 공무를 처리하던 곳.
멀리 보이는 성문은 1974년에 복원된 동문.
청허정으로 오르며 바라본 동헌과 객사.
해미읍성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청허정(淸虛亭).
멀리 천수만이 바라보이는 청허정은 일제때 신사를 세운 적도 있었지만 현재는 옛 모습대로 복원된 상태.
1579년 충청병영에서 근무했던 이순신 장군, 1790년 해미로 귀양왔던 다산 정약용도 청허정에 올라을듯.
청허정 주변의 아름다운 노송지대.
읍성 위에 올라서 바라본 해미의 농촌풍경.
오랜 세월 내측의 토사가 흘러 내리면서 성곽이 무척 얇아진 모습.
봄철이라 꽃이 만발한 해미읍성.
1974년에 복원된 해미읍성의 서문.
동헌, 객사, 초가 등 일부만 복원된채 아직도 빈땅이 넓은 실정.
앞의 넓은 땅은 예전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
예전에는 민가 수십여채와 학교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 이전되어 무척 허전한 모습.
승주의 낙안읍성처럼 원래 읍성에는 관아와 민가가 함께 있기 마련인데 민가를 모두 철거시켰음은 큰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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