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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각자성석(刻字城石)을 찾아서강바람의 유적답사 2024. 2. 9. 10:54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으면서 태조 5년(1396) 전국에서 20만명의 백성이 동원되어 한양도성(漢陽都城)을 축성하였는데 도성의 둘레는 약 18.6km에 달했습니다.
도성의 성벽 곳곳에는 축성과 관련된 기록이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이 끼워져 있는데요.
각자성석은 한양도성 축성기록을 품은 역사자료이자 도성 축성에 참여한 백성들의 노고를 확인할수 있는 증거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수 있지요.
각자성석은 조사결과 297개에 달하며 내용에 따라 천자문, 군현(지명), 이름 및 직책 각자로 구분합니다.
천자문 각자(14C)는 천자문을 통해 도성구간을 표시한 것으로 도성 전체를 600척(약 180m)씩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에 천자문 순서대로 한 글자씩 자호(字號)를 새겼으며 백악산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로 끝납니다.
군현 각자(15C)는 동원된 백성들의 출신 지방군현의 명칭을 새긴 각자로 성벽이 무너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그 구간을 축성한 지역담당자에게 책임을 물었으며
축성 담당군영, 축성일자와 감독관의 이름과 직책, 석수의 이름(18C 이후)까지 새겼습니다.
한성도성을 답사해 보니
14C, 태조때 초축할 당시의 성곽은 남산에 잘 남아 있는데 천자문 각자도 남산에서 여러 점을 볼수 있었습니다.
현존하는 각자성석은 약 41%가 15C, 세종 대에 새겨졌다고 하는데 특히 낙산 구간에서 많은 갯수의 군현각자가 발견되었으며,
18C, 숙종 대 이후는 담당일자와 축성일자, 감독관의 이름과 직책, 석수의 이름까지 새긴 정밀한 각자성석이 동대문 옆과 인왕산, 북악산 구간에서 여러점 발견되었습니다.
각자성석의 위치도 태조, 세종 대에는 성벽 외측 하단부에 설치되었으나 순조, 철종대에는 성첩(여장) 내측 하단부에 끼워넣고 더욱 정교해진 모습을 볼수 있었습니다.
서울시는 최근 각자성석에 대한 정밀조사를 실시하고 3D정밀 스캔작업을 진행중이며 한양도성 9개소에 모형안내판을 설치한바 있습니다.
한양도성의 각자성석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갖고 보호관리 방안을 강구했으면 좋겠네요.
조선 태조 5년(1396) 처음 축성한 이후 여러번의 개보수 과정을 거친 한양도성.
남산에 불규칙한 막돌로 쌓은 성벽은 조선 태조 대에 초축한 모습입니다.
낙산에 둥글거나 네모난 성돌로 쌓은 성벽은 조선 세종 대이며 성첩(여장)은 1970년대에 복원한 모습.
인왕산 동쪽에 네모난 모양으로 면을 잘 다듬어 정교하게 쌓은 순조 대의 한양도성.
< 1396년, 태조 대의 각자성석 >
남산에서 발굴조사 결과 새롭게 발견된 조선 태조 대의 각자성석.
겨우 식별되는 '奈字六百尺(내자육백척)' 각자.
14세기에 초축할 때에는 천자문을 통해 도성구간을 표시한 것으로 도성 전체를 600척(약 180m)씩 97개 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에 천자문 순서대로 한 글자씩 자호(字號)를 새겼으며 백악산 동쪽에서 천자(天字)로 시작하여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백악산 서쪽에 이르러 조자(弔字)로 끝났는데요.
이 구간의 명칭이 천자문의 60번째 글자인 '奈字(내자)'였음을 보여 줍니다.
3D정밀스캔작업을 통해 제작한 '奈字六百尺(내자육백척)' 모형 각자성석.
남산에서 발견되는 '監役判官 崔有遠 一百五十尺(감역판관 최유원 일백오십척)' 각자성석.
천자문 외에 공사책임자의 이름을 넣은 성석도 보입니다.
'監役判官 崔有遠 一百五十尺(감역판관 최유원 일백오십척)'은 감역판관 최유원이 150척을 쌓은 구간을 뜻하는데요.
1396년, 초축할때 감역관을 임명하고 성을 쌓게한 후 내역을 성돌에 새겨 넣은 것으로 오늘날의 공사실명제와 같다고 할수 있지요.
1396년, 초축할 때의 각자성석인 '称字終夜字(칭자종야자)'.
'称字終夜字(칭자종야자)'는 공사구간을 97개로 나누어 각 구간을 천자문에 나오는 한자로 이름을 붙였는데
본 각자는 54번째인 칭자(称字) 구간이 끝나고 55번째 야자(夜字) 구간이 시작된다는 표시.
남산 자유총연맹 축대에서 발견되는 '崗字六百尺(강자육백척)' 각자.
崗(강)이란 글자는 천자문 글자순서를 따라 축조해야 할 구간중 48번째 구간이라는 뜻입니다.
남산에 자유센터를 건립할때인 1962~64년 철거된 한양도성의 성돌을 아랫쪽으로 옮겨온 것이며 본래의 위치는 타워호텔(현재 반얀트리호텔) 자리입니다.
자유센터를 짓는다고 한양도성을 마음대로 철거하고 성돌을 옮겨다가 건물의 축대로 사용하였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 세종 대의 각자성석 >
낙산 남쪽 성곽에서 발견되는 '井邑(정읍)' 각자성석.
1422년, 세종 때 한양도성을 개축하면서 축성을 담당한 지방의 이름을 새겼는데 특히 낙산 구간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정읍은 전라도이니 낙산의 남쪽 성곽은 전라도 백성들이 담당하여 쌓은 증거네요.
낙산에서 발견되는 '咸悅(함열)' 각자성석.
함열은 전북 익산의 옛 지명입니다.
'同福始(동복시)'는 동복현에서 쌓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동복은 전남 화순에 있던 현입니다.
세종 대는 성벽을 쌓은 지방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가 성벽이 무너지면 한양에 다시 올라와 쌓게 했다고.
낙산 남쪽성곽에서 발견되는 '平澤/造/徘始(평택/조/배시)' 각자성석.
3개의 각자성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단에 徘始, 3단에 造, 4단에 平澤으로 당시 평택은 충청도였다고.
낙산 북쪽 구간에서 발견되는 'ㅁ山始(?산시)'라고 새겨진 각자성석
낙산 북쪽 성곽에서 발견되는 永同(영동)' 각자성석.
3D정밀스캔작업을 통해 밝혀진 글자는 '永同(영동)'.
충청도의 영동현(현 충북 영동군)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내용.
낙산 북쪽 성곽에서 발견되는 각자성석.
3D정밀스캔작업을 통해 밝혀진 글자는 '陰城(음성)'.
충청도의 음성현(현재 충북 음성군)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한 내용입니다.
인왕산 남쪽 자락에서 발견된 '鳳山上(봉산상)' 글자가 새겨진 각자성석.
성벽 밖의 하단부에 성돌로 끼워져 있으며 황해도의 봉산현 백성들이 공사를 담당한 구간의 시점을 표시.
< 숙종 대의 각자성석 >
동대문 옆, 낙산성곽의 끊어진 단면에서 발견되는 13개의 각자성석.
숙종 32년(1706) 4월, 삼군문의 하나인 훈련도감(훈국)에서 한양도성을 개축할때 끼워넣은 각자성석인데요.
이렇게 집단으로 있는건 이곳이 유일합니다.
각자성석에 새겨진 글자는 '訓局 策應兼督役將十人, 使韓弼榮, 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全守善, 三牌將 司果 劉濟漢, 石手 都邊手 吳有善, 一牌邊手 梁六吳, 二牌邊手 黃昇善, 三牌邊手 金廷立, 康熙四十五年四月日 改築(훈국 책응겸독역장십인, 사한필영, 일패장 절충 성세각, 이패장 절충 전수선, 삼패장 사과 유제한, 석수 도편수 오유선, 일패편수 양육오, 이패편수 황승선, 삼패편수 김정립, 강희사십오년 시월일 개축)'.
안내판의 설명에 따르면 숙종 32년(1706) 4월, 훈련도감의 관리인 한필영이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 2구간은 전수선, 3구간은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의 우두머리는 오유선이며 1구간 석수는 양육오, 2구간은 황승선, 3구간은 김정립이 참여하여 고쳐 쌓았다는 기록입니다.
석재의 운반을 담당한 관리들의 명단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고.
원래는 동대문과 연결된 성벽에 위치해 있던 걸로 추정되는데
1911년 일제때 전차선로를 가설하면서 동대문 북쪽의 성벽을 헐때 옆으로 옮겨졌고 1970년대, 2010년대 등 몇번의 개보수과정을 거치면서 또 조금씩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바로 직전에는 동쪽 성벽 밖에 있었으나 10여년 전에 바로 옆의 성벽 절단면으로 옮긴 역사가 있지요.
'訓局 策應兼督役將十人, 使韓弼榮 (훈국 책응겸독역장십인, 사한필영)' 각자.
개인적으로는 '훈국(훈련도감)의 책응겸독역장(책임감독관)이 10명인데 한필영이 공사를 총괄'하고로 해석하는게 옳지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사한필영' 성석은 본래의 위치도 아닌것 같고 공사를 총괄한 직책이었는지도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
'一牌將 折衝, 成世珏 二牌將, 折衝 全守善(일패장 절충, 성세각 이패장, 절충 전수선)' 각자성석.
'三牌將 司果, 劉濟漢, 石手 都邊手 吳有善(삼패장 사과, 유제한, 석수 도편수 오유선)' 각자성석.
'石手 都邊手 吳有善, 一牌邊手 梁六吳, 二牌邊手 黃昇善(석수 도편수 오유선, 일패편수 양육오, 이패편수 황승선)' 각자성석.,
'三牌邊手 金廷立, 康熙四十五年四月日 改築( 삼패편수 김정립, 강희사십오년 시월일 개축)' 각자성석.
10년 전만해도 14개의 각자성석과 같이 있다가 옆으로 옮겨질때 사라진 각자성석(오른쪽).
'一牌ㅁ(일패?)'라고 새겨진 각자같은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
< 순조, 철종 대의 각자성석 >
인왕산 동쪽의 성첩(여장)에서 발견되는 각자성석.
앞선 시기와 달리 순조 대에는 잘 다듬은 성석에 축성개요(축성일자와 감독관의 이름과 직책, 석수의 이름 등)를 기록하여 성 안쪽의 성첩(여장)에 쌓았으니 무척 진일보한 모습.
'嘉慶十一年 丙寅十月日 看役 崔日成 監官 李東翰 邊手 龍聖輝 (가경십일년 병인10월일 간역 최일성 감관 이동한 편수 용성휘)' 글자가 새겨진 각자성석.
순조6년(1806) 10월 최일성이 공사를 돌봤고 이동한이 공사를 감독했으며 석수 용성휘가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인데요.
공사후까지 책임을 지우려는 공사실명제를 볼수 있는 장면입니다.
북악산 동쪽, 청운대 부근의 성첩(여장)에서 발견되는 각자성석.
성첩(여장)의 네모난 성돌에 정성스레 새긴 각자성석.
'嘉慶九年 甲子十月日 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手 龍聖輝(가경구년 갑자 시월일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편수 용성휘)'.
순조 4년(1804) 10월 오재민이 공사를 이끌었고 감독은 이동한이 했으며 석수 용성휘가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내용입니다.
후대에 누군가 낙서하듯이 한글로 새긴 글자도 보이니 관리가 요구되네요.
3D정밀스캔작업을 통해 최근 설치한 모형안내판.
육안으로는 정확한 판독이 어려운 실정인데 정밀스캔작업으로 모형안내판을 설치하니 살펴보기에 아주 좋습니다.
북악산 숙정문 부근에서 발견되는 각자성석.
3D정밀스캔작업을 통해 밝혀진 내용은 '咸豊元年 九月日 監官 鄭仁ㅁ 看役 高錫豹 邊手 金振ㅁ(함풍원년 구월일 감관 정인ㅁ 간역 고석표 편수 김진ㅁ)'.
철종 2년(1851) 9월 정인ㅁ이 공사를 감독하고 고석표가 공사를 돌보았으며 석공 김진ㅁ이 참여하여 성벽을 보수했다는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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