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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장조)와 정조가 잠들어 있는 화성 융,건릉 탐방강바람의 유적답사 2024. 6. 14. 16:02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융.건릉을 찾았습니다.
융,건릉은 사도세자인 추존 장조(1735~1762)와 현경황후 홍씨(1735~1815)를 안장한 융릉과 정조(1752~1800)와 효의 황후 김씨(1753~1821)를 안장한 건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먼저 찾은 곳은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隆陵).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이며 혜경궁 홍씨는 부인입니다.
어려서는 매우 총명하고 글과 시를 잘 지었고 무예에도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한 대리청정을 보게 되면서 노론과의 마찰을 빗고, 급기야 영조 38년(1762) 나경언의 고변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된 후 27살때 뒤주에 갇힌지 8일만에 세상을 떠났지요.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수은묘로 만들었다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며 영우원으로 높였고 1789년(정조 13)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으며 1899년(광무 3)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며 융릉으로 높인 역사가 있습니다.
(수은묘 → 영우원 → 현륭원 → 융릉)
다음 찾은 곳은 융릉의 서쪽에 있는 정조의 묘소인 건릉(健陵).
정조는(재위 1776~1800)는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른 분으로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시킨후 화성을 건설하며 개혁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꽃을 피우진 못했지요.
그런데 정조의 처음 묻혔던 초장지가 융릉에서 가까운 남쪽에 있더군요.
이곳은 원래 강무당(무예강습소)이 있던 곳의 뒷쪽으로 정조의 뜻에 따라 1800년 처음 묻혔던 자리였으니 물이 나오는 등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1821년 정조비 효의왕후가 승하할때 지금의 건릉자리로 옮겨 합장한바 있지요.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며 12차례 현릉원을 찾은 분으로 나란히 묻혀 있는 부자지간의 릉을 보려니 가슴 한켠이 찡하네요 ~~!!
오랜만에 화성 융,건릉을 찾았습니다.
손님을 맞이해 주는 향나무 고목.
5년전 태풍으로 줄기가 하나 훼손되었지요.
융,건릉은 사도세자인 추존 장조(1735~1762)와 현경황후 홍씨(1735~1815)를 안장한 융릉과 정조(1752~1800)와 효의 황후 김씨(1753~1821)를 안장한 건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앞에서 볼때 오른쪽이 융릉, 왼쪽이 건릉.
역사문화관에서 본 '정조의 현릉원 거동길'.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기며 12차례 현릉원을 찾았습니다.
① 현릉원 천장길 -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화성으로 옮길때 다닌 길로 뚝섬에 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넜으며 과천행궁을 지나 화성에 도착하였으며 2회 이용.
② 과천행궁 경유 원행길 - 정조가 주로 이용한 길로 노량진에 배다리를 놓아 한강을 건너고 용양봉저정, 과천행궁을 지나 화성에 도착하였으며 5회 이용.
③ 시흥행궁 경유 원행길 - 어머니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다닌 길로 용양봉저정, 시흥행궁을 지나 화성에 도착하였으며 5회 이용.
융,건릉 재실.
재실은 재례를 준비하는 곳이나 평소에는 참봉 등이 근무하는 공간이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고.
재실의 개비자나무(천연기념물 제504호).
높이 약 4m, 줄기 둘레가 0.8m로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개비자나무 가운데 가장 크며 재실 건축 당시에 심은 것으로 추정.
재실 밖에 있는 향나무 고목.
노송들이 장관을 이루는 융건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대단 ~!
녹색의 향연을 펼치는 융건릉 숲.
융릉 가는 길에 있는 원대황교.
금천교 역할을 하는 자그마한 석교는 원래 수원비행장 남쪽의 황구지천에 있던 돌다리로서 1960년대까지 무너진채 남아 있었는데 1970년 비행장 확장공사 구간에 포함되어 일부 석재를 융릉 안으로 옮긴 역사가 있습니다.
정조 당시에는 비행장이 있는 들판을 걸어 황구지천의 대황교를 건너는 코스가 융릉 원행길이었으며 고종, 순종황제도 이 다리를 건너 융,건릉을 찾았다고 합니다.
수원비행장은 일제때 건설된 군용비행장입니다.
1960년대에 무너진채 남아 있던 대황교.
당초의 대황교는 13칸에 30m가 넘는 큰 다리였는데 남은 석재는 행방이 모호한 실정.
현 융능교에는 원대황교(元大皇橋)란 이름으로 1970년에 옮겨왔음을 새겨 놓았네요.
융릉 입구에 있는 곤신지(坤申池).
왕릉의 연못이 모두 사각형인데 반해 이곳은 특이하게 원형으로 이 곳은 융릉의 생방(生方)으로 릉자리에서 처음 보이는 물이라고.
먼저 찾은 곳은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隆陵).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수은묘로 만들었다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며 영우원으로 높였고 1789년(정조 13)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으며 1899년(광무 3) 장조의황제로 추존되며 융릉으로 높인 역사가 있습니다.
(수은묘 → 영우원 → 현륭원 → 융릉).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는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생부이며 혜경궁 홍씨는 부인입니다.
어려서는 매우 총명하고 글과 시를 잘 지었고 무예에도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한 대리청정을 보게 되면서 노론과의 마찰을 빗고, 급기야 영조 38년(1762) 나경언의 고변사건으로 왕세자에서 폐위된 후 27살때 뒤주에 갇혀 8일만에 세상을 떠났지요.
크고 화려하게 조영된 융릉.
정조는 현릉원을 만들때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고 원에는 세우지 않는 무인석도 만들었으며 정자각의 규모도 왕릉과 같이 크게 지었다고.
정자각에 매달려 있는 도르레.
옛날 제례때 햇빛을 막는 발을 걸어 두었던 장치라고 하는데 오늘 처음 봅니다.
융릉의 비각.
정조는 12차례 현릉원을 찾아 극진히 관리했으며 1800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가까이에 묻일 정도로 부친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던 분.
다음은 융릉에서 약 1km 떨어진 정조의 초장지를 찾아 갑니다.
깊은 숲길을 약 15분 정도 걸으니,
깊깊은 숲에서 만나는 정조의 초장지.
이곳은 원래 강무당(무예강습소)이 있던 곳의 뒷쪽으로 정조의 뜻에 따라 1800년 처음 묻혔던 자리였으니 물이 나오는 등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1821년 정조비 효의왕후가 승하할때 지금의 건릉자리로 옮겨 합장한바 있지요.
2009년 정조 초장지 발굴때의 모습.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노송이 가득한 화산산책로를 걷는 일.
융.건릉을 품고 있는 약 3km의 화산산책로를 걸으면 건릉을 만날수 있지요.
릉숲을 걷는 일은 가장 행복한 일 ~!
융릉, 건릉 사이의 화산 고갯길.
옛날에는 화성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수원 , 한양으로 오갔을듯.
아름다운 산책로를 30여분 걸은 끝에,
드디어 정조가 묻혀 있는 건릉에 도착.
정조는(재위 1776~1800)는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할아버지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른 분으로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시킨후 화성을 건설하며 개혁정치를 펼치려 했으나 갑작스런 죽음으로 꽃을 피우진 못했지요.
아쉽습니다.
깔끔하고 단정하게 조영되어 있는 건릉.
정조가 생전에 점찍어 놓은 자리라고 하며 원래는 수원향교가 있었다고 하네요.
벌써 더위가 장난이 아니네요.
사람이나 식물이나 목이 마른 실정.ㅎㅎ
다시 노송길을걸어 융건릉 답사를 마무리 지으며,
릉 밖으로 나와 융.건릉~용주사 가는 옛길을 찾았습니다.
차량이 다니던 옛길은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전용산책로로 조성되고 있더군요.
너무나 다르게 변한 모습에 어이가 없을 정도.ㅎㅎ
정조 초장지 앞에 보이던 홍살문은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최근 세운 것.
정조의 초장지 안내문을 보면
"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생전에 아버지 곁에 묻히고자 했던 정조의 뜻에 따라 현릉원 동쪽건릉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821년 정조비 효의왕후가 승하하여 건릉에 합장하려고 할때 건릉의 릉자리는 길지가 아니므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 결과 정조가 생전에 릉자리로 염두에 두었던 여러 곳 가운데 수원향교 옛터에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하여 모시게 된것이 현재 건릉이다. 묘역은 화산에서 뻗어내린 낮은 미간고지에 조성되어 있다."
밖에서 본 정조의 초장지.
문외한의 눈으로도 현재의 릉자리만은 못해 보이네요.ㅎㅎ
융건릉 남쪽에 건설중인 화성태안신도시.
옛날에는 큰 동네(릉마을)가 있었고 주변은 모두 농경지였는데 신도시가 건설되며 동네는 사라진채 모든게 변해 버렸네요.
원래 융건릉 일대의 화성시 화산동은 조선시대에 수원부가 있던 수원의 중심지였지요.
정조때 화성을 건설하며 지금의 위치로 수원부를 옮기고 융건릉 일대는 화성이 되었으니 뭔가 뒤바뀐 것이 아닐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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