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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 외금천교(外禁川橋)와 외연지(外蓮池)터 탐방강바람의 유적답사 2024. 6. 7. 08:13
동구릉 외금천교와 외연지터를 탐방하였습니다.
동구릉은 조선 태조의 건원릉이 조성된 1408년부터 경릉에 헌종의 두번째 왕비 효정왕후가 모셔진 1904년까지 500여년에 걸쳐 7명의 왕과 10명의 왕비가 모셔진 곳입니다.
동구릉 입구에는 원래 신성한 왕릉의 공간과 속세 공간을 구별하는 물길인 금천이 흐르고, 두 영역을 이어주는 돌다리인 금천교와 물길이 흘러드는 연못인 연지가 있었습니다.
동구릉 내 각 왕릉 진입공간의 금천교, 연지와 구별하여 외금천교와 외연지라고 했는데요.
외금천교와 외연지의 모습은 1975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에서도 확인할수 있으나 이후 동구릉 입구를 지나는 43번 국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철거되었으며 석재는 동구릉 경내에 옮겨져 숲속에 보관되었습니다.
외금천교의 부재를 분석한 결과 2개의 무지개 모양의 아치로 이루어진 홍예교였음을 확인할수 있었으며 근래 외금천교의 부재를 활용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재현하여 전시중입니다.
그러나 금천교의 크기가 동구릉에서 흘러나오는 금천보다 훨씬 커서 실제로 외금천교가 맞는지 의구심도 드는데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전나나학예연구사는 동구릉 홍예석은 경복궁 영제교의 부재로 추정된다고 발표한 적이 있는데 홍예돌의 표면이 섬세하지 않은걸로 볼때 이 말도 신빙성은 크지않아 보입니다.
한편 릉 밖의 43번 국도 건너편에는 외연지터가 남아 있는데요.
외연지의 정확한 조성연대는 알수없으나 관련된 언급은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숙종 12년(1688)의 기록이 가장 이르며,
춘관통고와 건원릉지의 기록에 따르면 외연지의 규모는 길이 70척, 너비 52척에 이르렀다니 환산하면 21x15.6m로 아담한 크기입니다.
연꽃이 피던 외연지는 도시화가 가속되면서 50여년전 흙으로 완전 매몰된채 평탄한 땅으로 변하여 보호울타리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며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중으로 향후 어떤 계획이 있는지는 모호한 실정입니다.동구릉 경내에 일부 복원해 놓은 홍예교 모습의 외금천교.
동구릉 입구에는 원래 돌다리인 외금천교와 연못인 외연지가 있었으나 1970년대 국도43호선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외금천교는 철거되어 동구릉 경내로 옮겨졌고, 외연지는 흙으로 메꾸어졌습니다.
외금천교의 부재를 분석한 결과 2개의 무지개 모양의 아치로 이루어진 홍예교였고 규모도 상당히 컷음을 확인.
양편의 홍예교 석재가 맞물리는 모습은 보기 어려운 사례.
일부는 주춧돌로 사용하려다가 홍예교 석재로 사용된듯.
홍예교의 상판을 이루어 사람들이 밟고 다녔을 석재로 추측.
홍예교 석재 외에 왕릉에서 사용하던 소맷돌,귀틀석, 주초석, 장대석 등 출처불명의 석재들도 전시중.
이해를 돕기 위해 1914년 지적도와 2019년 항공사진을 중첩하여 연출한 자료에 의하면
외금천교는 도로에 완전 편입되었고, 외연지(붉은 선)는 도로 건너편에 있는 모습.
43번 국도 아래로 흘러가는 금천.
동구릉에서 흘러드는 금천은 외금천교가 있던 국도 아래를 거쳐 왕숙천으로 갑니다.
앞에 있는 횡단보도 즈음에 과거 외금천교가 있었을것으로 추정되며 도로를 건너면 바로 외연지터.
동구릉 앞의 도로를 건너면 도로와 접하여 보존되어 있는 외연지터.
예전에는 외금천교와 옆으로 외연지가 있는 무척 정겨운 풍경이었겠지만 지금은 도저히 상상이 않갈 정도로 변한 상태.
연꽃이 피던 외연지는 도시화가 가속되면서 50여년전 흙으로 완전 메꾸어져 평탄한 땅으로 변한채 울타리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며 실제 크기는 약 21x15.6m로 아담한 크기.
외연지는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중으로 향후 어떤 계획이 있는지는 모호한 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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