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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덕숭산 수덕사(修德寺), 환희대, 수덕여관 탐방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5. 7. 26. 09:02
2025.7/13(일) 예산 수덕사(修德寺)를 찾았습니다.
수덕사는 문헌으로 남아 있는 기록은 없지만 백제 위덕왕(554~597)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요.
고종 2년(1865)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충남 일대에 말사 50여 개를 두고 있습니다.
덕숭총림(德崇叢林)으로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조계종 4대 총림으로 꼽히며
총림이란 선원(참선도량), 강원(불교대학), 율원(불교대학원), 염불원(염불도량)을 모두 갖춘 도량을 말합니다.
수덕사 대웅전은 국내에 현존하는 목조건물가운데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에 이어 오래된 건축물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수덕사를 둘러본후 큰 마음 먹고 환희대를 찾았습니다.
환희대(歡喜臺)는 수덕사의 비구니 암자로 우리나라 최초 신여성이자 문인인 김일엽스님(金一葉, 1896~1971)이 만년에 수도정진하다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한데요.
그녀의 본명은 김원주로 최초의 대중가요로 불리는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 최초의 근대 여류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던 인물이었지요.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주창하는 등 늘 이슈의 중심에 있었으나 이후 결혼에 실패하고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껴 1933년 출가를 단행한 후 30여 년간 수덕사 견성암에서 입승을 맡아 치열한 수행을 이어갔고 만공스님으로 부터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만년에 절필했던 붓을 다시 들어 '청춘을 불사르고', '어느 수도인의 회상',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 등의 수필집을 발간한바 있습니다.
다음 찾은 곳은 수덕여관.
절 경내에 여관이 있음은 무척 낯선 일이나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 화백이 나혜석에게서 그림을 배우려고 드나들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요.
고암 이응노는 동양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힌 현대미술사의 거장으로 꼽힙니다.
수덕여관은 원래 비구니 스님들의 거처였다가 절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지자 객사로 사용되던중 1944년 이응노 화백이 마흔살때 수덕사에서 구입한 후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15년간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곳.
1965년 북한공작원이 6.25 사변때 납북된 아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동베를린으로 간 것이 화근이 될줄이야.
그가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고 1969년 사면된후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2달 가량을 머물면서 마당바위에 2점의 문자추상화를 남겼습니다.
이응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6).
나혜석은 1934년 이혼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수덕사에서 수행중이던 친구인 일엽 스님을 찾아 왔고 주지인 만공 스님께 출가하길 청했다고 하는데요.
만공 스님은 '임자는 중 노릇할 사람이 아니야'라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나혜석은 뜻을 굽히지 않고 5년 동안 수덕여관에 머물렀지만 끝내 출가는 이루지 못했다고 하네요.
수덕여관에 머무를 당시 찾아온 이응노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파리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었던 나혜석의 영향으로 이응노 화백이 수덕여관도 구입하게 된것이지요.
오늘은 아쉽게도 덕숭산 1,020계단을 따라 오름길에서 볼수 있는 미륵불입상, 만공탑, 금선대, 정혜사를 보지 못했지만 역사 깊은 수덕사를 다시 음미하고 환희대와 수덕여관을 살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랜만에 예산 수덕사를 찾았습니다.

품격있는 모습의 수덕사 일주문.

수덕사 가람배치도.
수덕사는 완만한 덕숭산의 구릉을 따라 3단의 석축을 쌓고 가장 윗쪽에 대웅전을 배치한 전형적인 산지가람인데요.
수덕사 본사나 주위에 있는 암자들이 건축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들을 둘러싼 주변 경관도 매우 수려하여 가슴이 흥분될 정도.

일주문에 걸린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 편액.
편액은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선생의 글씨.

금강문을 오르고,

다시 계단을 걸어 사천왕문에 이르러,

사천왕에 인사를 드린후,

부처님의 정신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의미를 가진 황하정루(黃河精樓).

오호, 덕숭산 수덕사~!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49호로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앞면 3칸 측면 4칸 크기에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형태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우리 목조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앞에서 볼때 왼쪽은 우백호를 상징하는 백련당(白蓮堂), 오른쪽은 좌청룡을 상징하는 청련당(淸蓮堂)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시대에 유행한 주심포 양식이고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맞배지붕.

한 여름이라 앞면에 달린 빗살문을 모두 열어놓은 모습.
바른 돌쌓기 형식의 기단에 사각형의 자연석으로 기둥놓을 자리를 북돋게 조각한 주춧돌을 놓았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의 각 칸에는 섬세한 빗살 3분합문이 있고 측면에는 맨 앞쪽에 출입문을 설치하였습니다.

배흘림 기둥이 돋보이는 대웅전 내부 모습.

대웅전에 모셔진 목조삼세불좌상.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약사불, 왼쪽에 아미타불.

삼세불좌상은 만공스님이 전북 남원에 있는 귀정사(歸淨寺)에서 옮겨 온것이라고.

고색창연한 대웅전 천장 모습.
내부에서 올려다 본 가구와 연등천장 모습으로 경쾌하고 최고의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맞배지붕 모습을 하고 있는 대웅전 측면.
예전에는 풍판이 달려 있었으나 제거하여 노출시킨 모습이라고 하네요.

특히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의 구도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수덕사 삼성각.

치성광여래도, 산신도가 있는 삼성각 내부.

우아한 모습의 법고각.

화려한 모습의 법고(法鼓).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으로 보통 쇠가죽으로 만드는데 짐승을 비롯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울린다고 하지요.
거북등에 용머리를 한 짐승이 법고를 받치고 있고 용이 그려진 법고와 서로 마주보는 형상으로 조형미가 매우 뛰어납니다.

법고각 맞은편에 있는 범종각.

범종은 1974년, 경내에 주조공장을 설립하여 사대부중의 서원과 정성을 모아 주조했다고.

청련당에 걸려 있는 '세계일화(世界一花)' 편액.
만공(滿空, 1871~1946)스님이 1945년 해방의 기쁨을 표현한 글씨라고 하네요.
세계는 하나의 꽃이요 부처님이라는 뜻으로 스님은 정혜사 뜰에 떨어진 무궁화 꽃잎에 먹을 묻혀 세계일화라는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덕숭산 정상까지 오르내리며 정혜사, 금선대, 견성암 등을 답사하곤 했지만 오늘은 일행이 있고 시간도 제약적이라 이 정도로 아쉬움을 달래기로.

절에서 내려오다가 환희대를 찾았습니다.
수덕사는 여러번 찾은 적이 있었지만 환희대는 처음이네요.

환희대(歡喜臺)는 수덕사의 비구니 암자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신여성이자 문인인 김일엽 스님(金一葉, 1896~1971)이 수도정진하다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한데요.
그녀의 본명은 김원주로 최초의 대중가요인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 최초의 근대 여류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던 인물이었지요.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주창하는 등 늘 이슈의 중심에 있었으나 이후 결혼에 실패하고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껴 1933년 출가를 단행한 후 30여 년간 수덕사 견성암에서 입승을 맡아 치열한 수행을 이어갔고 만공 스님으로 부터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만년에 절필했던 붓을 다시 들어 '청춘을 불사르고', '어느 수도인의 회상',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 등의 수필집을 발간한바 있습니다.

환희대 원통보전.
일엽 스님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자 원담의 지휘 아래 월송과 정진 두 비구니가 건립했다고.

느티나무 노거수가 있는 원통보전 앞 풍경.
아랫편에는 비구니 승방으로 쓰이는 보광당(普光堂).

환희대 안에 승방으로 보이는 아담한 건물이 보이는데요.
일엽스님이 만년에 10년간 주석하던중 1971년에 입적한 곳으로 생각됩니다.

다음 찾은 곳은 환희대 아래에 있는 수덕여관.
절 경내에 여관이 있음은 무척 낯선 일~~??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顧庵 李應魯, 1904~1989) 화백이 나혜석에게서 그림을 배우려고 드나들면서 인연을 맺어 소유주인 수덕사로 부터 구입하였는덷요.
고암 이응노는 동양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힌 현대미술사의 거장으로 꼽힙니다.

이응노 화백이 쓴 '수덕여관' 간판은 없어지고 '수덕사선미술관' 간판이 걸려 있는 대문 모습.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 화백 외에도 신여성인 나혜석과 일엽스님, 만공 스님에 얽힌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오는데요.
이 건물은 원래 비구니 스님들의 거처였다가 절을 찾는 손님들이 많아지자 객사로 사용되던중 1944년 이응노 화백이 마흔살때 수덕사에서 구입한 후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15년간 머물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곳.
1965년 북한공작원이 6.25 사변때 납북된 아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동베를린으로 간 것이 화근이 되었지요.
그가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고 1969년 사면된후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 전에 2달 가량을 머물면서 마당바위에 2점의 문자추상화를 남겼다고.
그런데 이응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6).
나혜석은 결혼에 실패한후 비구니가 되고자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이응노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파리에 대한 환상을 심어 주었다는 후문.

수덕여관을 운영했던 이응노 화백의 본처 박귀희(1909~2001) 여사는 참으로 억울한 한 평생을 사신것 같은데요.
그녀는 1925년, 16세에 이 화백과 결혼하였으나 1958년 이응노는 부인 박귀희를 수덕여관에 남기고 파리로 건너갔지요.
본처의 인생을 무참히 짓밟으며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겁니다.
이응노가 22살 연하의 대학제자와 프랑스로 떠나고 이혼을 당했음에도 박 여사는 생계를 위해 수덕여관을 운영하였으며 1969년 옥고를 치른 이 화백은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수덕여관을 찾았고 그녀는 10년 만에 돌아온 그를 정성껏 돌봐주었다고 전합니다.
이 화백은 몇달간 머물다가 다시 프랑스로 떠났고 그녀는 한많은 세상을 살다가다 2001년, 92세에 별세한바 있지요.
수덕사에서는 2006년 고암의 조카로 부터 다시 수덕여관을 매입한후 지방비를 들여 해체복원사업을 한바 있습니다.

이응노 화백이 너럭바위에 남긴 문자추상화는 2점.
1969년 사면되어 두달 남짓 수덕여관에 머물면서 남긴 그림인데요.
한자와 기형적인 문양에 팔괘을 넣어 표현하였는데 그림에 담긴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암울한 그의 마음을 표현한 작품임에는 틀림없을것 같습니다.

우물과 너른 바위, 장독대가 있는 수덕여관 뒷편.
꽤 정감있는 풍경이며 윗편의 건물은 환희대 보광당.

윗편에 있는 또하나의 문자추상화.
무엇을 그린 것이냐는 물음에 이응노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만물의 흥망성쇠를 표현했다"고 얘기했다고.

우물가에서 바라본 수덕여관.
비록 초가집이지만 ㄷ자로 꽤 잘 지은 집으로 보입니다.

안쪽에서 바라본 수덕여관.
수덕여관은 박귀희 여사 별세후 몇년간 방치되던중 수덕사에서 2006년 고암의 조카로 부터 다시 수덕여관을 매입한후 지방비를 들여 2007년 해체복원사업을 한바 있습니다.

수덕여관 뒷편에 못보던 건물이 보이네요.
감로당(甘露堂)이라고 하는데 수덕사 템플스테이 숙소로 사용키 위해 근래 지었다고 합니다.

단층으로 수덕사 대웅전과 닮은 맞배지붕을 형상화했다는 수덕사선(禪)미술관.
수덕여관 바로 아래에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전물 미술관으로 2010년 개관하였으며 수덕사 3대 방장스님의 법호을 딴 '원담전시실' 과 고암 이응노 화백의 호를 딴 고암전시실로 구분.

고암 이응노 화백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고암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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