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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상징인 남강 진주성(晉州城) 탐방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4. 11. 30. 08:58
경남 진주시에 위치한 남강 진주성을 찾았습니다.
진주성은 옛부터 바다에 접한채 전라도와 경상도를 방어하는 전략적인 요충지로 인식되어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는 중요한 기지로 여겨졌으며 조선시대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경상우병영의 역할을 담당했는데요.
남강에 접한 진주성은 현재 성곽의 둘레가 약 1.7km에 달하며 촉석문과 공북문 등 문루를 갖춘 큰 성문이 있고
성 안에는 촉석루, 창렬사, 의기사, 북장대, 서장대, 임진왜란계사순의단, 호국사가 있으며 임진왜란을 다룬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이 있습니다.
또한 촉서루 아래 남강변에는 논개가 적장을 끌어안은채 남강물에 몸을 던졌다는 의암(義巖)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9월, 1차 진주성 전투때에는 왜군 25,000여명이 침공해 오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장군은 3,800여명의 군사와 백성의 힘을 합쳐 크게 무찔러 이기니 곧 청사에 우뚝한 진주대첩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왜군이 설욕을 노려 9만여명이 제침하자 7만의 민관군이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했으니 전무후무한 대참사가 벌어진 역사의 현장입니다.
진주성은 1604년(선조 37) 마산 합포에 있던 경상우병영을 옮겨왔고 1895년(고종 32)에는 경상남도 관찰사가 집무를 보는 진주관찰부가 설치되고 1896년에는 촉석루 앞에 경상남도관찰사의 감영이 건립되었으며 1925년까지 경상남도 도청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난공불락의 진주성은 일제강점기와 6.25 사변을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어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요.
일제때에는 왜인들이 성곽을 허물고 성안에 신사를 설치하였고 해자역할을 하던 대사지(연못)가 메꾸어지고 외성은 흔적조차 없이 철거되어 사라졌으며 성 안에는 옛 건물들이 수십동이나 있었지만 6.25 사변때 폭격으로 대부분 사라진채 휑한 느낌만 줄 뿐입니다.
1960년대 이후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복원사업이 추진되고 성 안에 있던 민가 751동을 이전시키기도 했지만 아직도 미흡한 실정입니다.
넓다는 이유로 공원의 기능만 강조할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옛 건물들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요구되며 진주성하고는 관계없는 시설들이 성 안에 들어서는건 타당치 않으니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진주시나 국가유산청에서는 장기복원계획을 수립하여 제 모습을 찾을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부탁드립니다.
경남 진주시에 위치한 남강 진주성을 찾았습니다.
강건너 남강에서 바라보는 진주성은 처음인데요.
앞에 진주성 촉석루와 논개의 혼이 서려 있는 의암이 보입니다.
6.25 사변때 불 탄것을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1960년대에 복원한 촉석루.
충절의 고장, 진주를 상징하는 늠름한 모습이네요~!
그런데 진주성의 아픔은 잊혀졌나요?
진주성 아래 남강에서 해마다 펼쳐지는 유등축제가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7만여명 이상의 수많은 군사와 백성이 장렬하게 싸우다가 죽임을 당한 곳에서 불꽃놀이라니 이건 아닌것 같습니다
남강변에 있는 대숲.
강변 대숲을 걷는 일도 큰 즐거움이네요.
진주성 외곽을 한바퀴 돌며 바라본 서장대.
북쪽, 동쪽은 주택지와 접해있어 다소 허해 보이나 남쪽과 서쪽은 어디에서 보나 난공불락의 요새같습니다.
1970년대에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 성곽.
일제강점기, 6.25 사변을 겪으면서 만신창이가 된 진주성의 성곽과 공북문, 촉석문 등을 그 당시 대대적으로 복원한바 있습니다.
오늘 진주성 답사는 동쪽에 있는 촉석문에서 출~발!!
공북문보다는 규모가 작은 단층문루이지만 진주성의 정문 대접을 받고 있는 촉석문.
성문 한쪽을 가릴만큼 덩치 큰 매표소는 이전함이 마땅~!
1960년 촉석루 복원을 시작으로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한바 있으며 그 당시에는 달력사진에 자주 등장할만큼 유명한 성문입니다.
성곽 아래로 남강 의암과 의암사적비가 바라보이네요.
촉석루를 들어서 제일 먼저 만난건 영남제1루, 촉석루.
6.25 사변때 소실되어 국보에서 제외되었지만 상당히 웅장하고 멋드러진 루각입니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의 촉석루는 전시에는 지휘본부로 사용되었지만 평시에는 풍류를 즐기거나 향시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사용되었다고.
누각 아래 돌기둥은 창원 촉석산에서 채석했고, 목재는 강원도 오대산에서 가져왔으며 루에는 4개의 현판과 시인묵객들의 시판이 걸려 있습니다.
촉석루의 유래는 강가의 바위가 우뚝 솟아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남장대(南將臺) 혹은 장원루(壯元樓)로 부르기도.
6.25 사변때 불 탄것을 시민들의 힘을 모아 1960년대에 복원.
진주 시민들의 자긍심이 대단하신것 같습니다.짝짝~!
예로부터 남쪽은 진주 촉석루, 북쪽은 평양 부벽루라 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과 그림을 남긴 촉석루.
촉석루 아래를 통해 바라본 남강 의암과 의암사적비.
진주성의 남강변은 바위지대로 되어 있어 풍광 또한 뛰어나지만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네요.
논개를 애도하며 나는 국가와 겨레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해 봅니다.
논개(論介)가 왜의 재침으로 진주성이 무너지자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왜장을 유인해 강물에 몸을 던져 충절을 다한 의암.
서쪽과 남쪽에는 선인들이 새긴 '義巖' 글자가 있다고.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편액이 달린 의암사적비.
2차 진주성 싸움때 성이 함락되자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은 진주 관기 논개의 행적을기록한 비석인데요.
논개에 대한 이야기는 진주 사람들의 입으로 전승되다가 1620년에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에 처음으로 기록되었으며 그후 인조 7년(1629) 정대륭이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영조 16년(1740)에는 사당인 의기사를 세운바 있습니다.
촉석루 아래 바위지대에서 바라본 진주성.
삼면에서 공격해오는 왜놈들을 맞아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장렬하게 순국하였을지 가슴이 멍하네요~~!!
지수문을 통해 들어가면 의기사(義妓祠).
의기사는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영조 16년(1740) 처음 지어졌으나 지금의 건물은 1956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라고.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활동한 제말과 그의 조카 제홍록의 공적을 함께 새긴 비석.
공원처럼 꾸며진 진주성 내부.
일제강점기때 신사를 세우고 공원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옛 모습을 복원하려는 의지는 없이 그냥 공원으로 만족하는것 같아 씁쓸하네요.
서장대로 가는 경사진 성곽길.
진주성의 끝부분 언덕 위에 서있는 서장대.
동쪽의 총석문으로 입장하여 성곽을 따라 서쪽의 끝지점인 서장대까지 왔네요.
서장대에서 바라본 남강.
서장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호국사(護國寺).
호국사는 고려말에 왜구를 막기 위해 지은 사찰로 임진왜란때에는 승병들의 근거지였던 곳이며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숙종대에 호국사란 이름으로 재건했다고.
호국사 옆 언덕 위에 있는 창렬사.
창렬사(彰烈祠)는 임진왜란 당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모시기 위해 선조 40년(1607)에 건립한 사액서원으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을 비롯하여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고.
성곽길을 걷다가 북쪽에서 만난 포루.
진주성을 방어하는 포진지를 말하며 당초 내,외성에 12좌가 설치되었으나 1969년 복원시 상징적으로 1개소만 복원.
포루에 설치되었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으로 사거리는 1km 남짓.
포루에서 바라본 진주시가지.
1세기 전만해도 진주성의 외성이 있던 곳이나 일제강점기때 도시확장으로 외성을 허물고 주택지로 조성한 모습.
잠시 성곽길에서 내려와 성 안으로 들어오면,
1984년 개관한 국립진주박물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며 1998년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
국립진주박물관 뜰에 있는 산청 범학리 3층석탑(국보).
일제때 산청 범학리 절터에서 반출되어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옮겨졌다가 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제자리도 아닌 국립진주박물관 앞뜰로 이전된 3층석탑.
문화재가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반출되어 떠도는건 일제때나 지금이나 여전한것 같습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의 석탑으로 1층 탑신에는 공양하는 보살상 4구가 조각되어 있고,
상층기단에는 8구의 갑옷을 입은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채로운데요.
신장상과 보살상의 조합은 독특한 사례로 9세기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중요한 자료가 되며 당대의 뛰어나 조각기술과 불교미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고.
다음 방문처는 성 안에 있는 청계서원(淸溪書院).
순조 33년(1833)에 건립되었으며 고려 현종때 거란을 물리친 정신열 선생과 고려말 물레를 개발하여 따뜻한 목화옷을 입게 한 정천익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서원.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때 훼철된 것을 1961년 지금의 자리에 봉남서당으로 복원하였으며 1993년 숭은사와 진사청을 재건하여 청계서원으로 복원.
진주성 북장대(北將臺).
서장대에 비교하니 문루 형식의 제법 크고 웅장한 모습이네요.
북장대는진남루(鎭南樓)라고도 했으며 진주성의 북쪽 지휘소로 사용.
북장대 밑에서 만난 경절사(擎節祠)
고려조 충절신 하공진(河拱辰)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제를 올리는 곳으로 현종 원년에 40만 거란대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장군이라고 하네요.
진주성 비석군.
이 비석들은 진주성 혹은 시내 각처에 있던 30여기의 비석을 1973년 모아둔 것입니다.
오호, 진주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남포정사 문루!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는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영의 문루이며 망미루(望美樓)라고도 불렀습니다.
진주목 시대에는 진주성 내성의 관문이었고, 고종 32년(1895) 관찰부가 설치될때는 진주관찰부의 관문, 1896년 진주관찰부가 경남도청으로 바뀌면서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며 1925년 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에는 도청의 정문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진주성의 부침을 지켜본 유일한 건물로 소중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남포정사 문루 앞에 서있는 수령이하개하마비(守令以下皆下馬碑).
수령 이하의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라는 경고성 문귀.
진주성의 북문인 중층문루의 공북문(拱北門).
도청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으로 북쪽에 계신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뜻이라네요.
1972년 촉석문 복원에 이어 공북문은 1975년 복원을 마친바 있습니다.
공북문 안에 있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1554~1593) 장군 동상.
임진왜란때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김시민 장군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진주성 답사를 성공리에 마쳤으니 진주를 대표하는 노포에서 육회비빔밥이나 먹어볼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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