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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만덕산의 백련사~다산초당 오솔길을 걷다강바람의 국내여행 2026. 4. 9. 12:05
2026.4/4(토) 강진 구강포 만덕산에 위치한 백련사, 다산초당을 찾았습니다.
고찰 백련사에서 만덕산(408m) 자락을 걸어 다산초당까지는 4년만의 일이네요.
백련사(白蓮寺)는 통일신라 말기에 무염스님이 창건하였으며 고려때 여덟명의 국사, 조선시대에는 여덟명의 대사를 배출한 고찰로서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1km 남짓의 산길은 백련사 혜장선사와 다산 정약용이 오가던 길로 유명하지요.
아암 혜장선사(兒巖 惠藏禪師,1772~1811)는 대단한 학승으로 다산이 읍내 사의재에 거주할때인 1805년 알게되어 고성암으로 옮겨갈수 있었으며 그후 깊히 교류했다고 하는데 사실 백련사와 가까운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것도 혜장선사와 가까이 지내고 싶은 마음이 컷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산은 혜장과의 만남을 통해 막혔던 숨통을 틔울수 있었고 그와 토론하며 학문적 자극을 받고 외로움도 달랠수 있었지요.
혜장은 다산보다 10살 연하였고 승려였지만 유학에도 조예가 깊고 시도 뛰어 났다고 하며 다산은 혜장을 통해 차를 알게 되었고 그후 초의선사와도 교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혜장은 서른아홉에 요절하고 말았는데 다산의 슬픔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고.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이 사학(邪學, 천주교)에 물든 죄인이 되어 강진으로 귀양온 것은 순조 11년(1801) 11월의 일인데요.
형 약전과 나주 율정점에서 헤어져 각기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길을 떠난후 다산은 18년의 유배생활중 11년을 다산초당에서 머물며 후진을 양성하고 실학을 집대성하였지요.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류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강진 읍내의 사의재, 고성암 보은산방 등을 거쳐 47세이던 1808년 봄,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818년까지 거처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다산이 1808년 봄, 윤단(尹慱)의 정자에 놀러 갔다가 아늑하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경치에 반한 나머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의 흔쾌한 허락으로 마침내 거처를 삼게 되었다는 후문.
다산은 정성을 다해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단장하며 다산초당을 일구며 자신을 다산초부(茶山樵夫)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이번 3박4일의 남도 답사여행은 나름 의미가 컷는데요.
마지막으로 방문한 백련사에서는 천연기념물 제 151호로 지정된 동백숲에 취해 시간가는줄도 몰랐을 정도였지요.
꽃이 피어 붉게 물든 백련사 동백숲은 절 앞도 대단했지만 다산초당 방향으로 펼쳐진 동백숲은 더욱 장관을 이루더군요.
절을 에워싸듯 9,000그루나 되는 동백나무가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로 밀림을 이루어 아름다웠고 그 안에 차분히 서있는 여러 기의 부도들은 너무 경건한 나머지 장엄하기까지 하더군요.
아름다운 동백숲을 대하며 이곳에 또다시 올수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200여년 전에 다산이 혜장선사와 서로 교류하기 위해 분주히 오가던 만덕산 오솔길을 걷고 밀림을 이룬 동백숲도 음미하는 아름다운 여정이었습니다.

강진 구강포에서 백련사와 다산초당이 위치한 만덕산을 바라봅니다.

강진땅을 밟으면 늘 가슴이 애잔해지고 콩닥콩닥 뛰기도 하는데요.
고찰 백련사를 찾기는 4년만의 일.

백련사 동백숲 가는길~!
일주문을 들어서니 동백숲이 장관을 이루기 시작.

백련사로 올라가는 좌우의 아름다운 동백숲.
욕심이 너무 과했나요!!
어제 방문했던 보길도는 동백꽃이 한창이었는데 백련사는 이제 끝물처럼 꽃이 드문드문 보여 아쉬움이 크네요.ㅎㅎ

오호, 해탈문?
그동안 보지 못했는데 근래 복원한것 같습니다.

해탈문 안에 모셔진 분은 문수동자, 보현동자 인가요?

4년만의 방문인데 백련사가 그동안 많이 변했네요.
만경루 앞에 못보던 건물이 또 보입니다.

봄꽃이 아름답게 핀 백련사 만경루 앞.

만경루 앞 목백일홍의 자태는 여전하네요.
백련사에는 만경루, 응진전, 삼성각 앞에 각기 한 그루씩 배롱나무가 있지만 역시 만경루 앞이 가장 오래되고 크며 멋집니다.

8월이면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목백일홍.
여름부터 가을까지 백일 동안 피었다가 지다를 반복하는데요.
만경루에서 활짝 핀 목백일홍 너머로 바라보는 구강포는 너무 황홀해서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시인들은 배롱나무의 매끄럽고 하얀 나뭇결을 빗대어 '여인의 살결'이라 묘사하기도 했다네요.ㅎㅎ

오랜 세월 많은 사랑을 받아오는 백련사 만경루.
예전에는 스님들이 만경루에서 선방삼아 수행을 했으나 지금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사용하다고.

만경루 아래로 들어가며 바라본 대웅보전.

백련사 대웅보전은 조선 영조때 화재로 소실된 후 다시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무척 늠름한 모습.

대웅보전 현판은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1705~1777)의 글씨로 두쪽으로 이루어진 현판이 무척 특이합니다.
원교 이광사는 가까운 신지도에서 귀양살이하다가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때 쓴것으로 생각됩니다.

백련사 대웅보전 안 삼존불.

대웅보전 마당에서 바라본 만경루.

만경루 현판도 원교 이광사의 글씨.
예전엔 현판이 루 안에 걸려 있었는데 언젠가 밖으로 옮겨졌네요.

루마루에 앉으면 앞에 유유히 흐르는 아름다운 구강포가 바라보여 멍한채 한없이 앉아있고 싶은 마음.

만경루에서 바라본 구강포.
백련사에서 감상할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니 가슴이 뭉클할 정도지요.

자태가 고운 목백일홍을 앞에 둔 삼성각.

만덕산 자락에 차분하게 앉아있는 명부전 등 절 풍경.

앞에 만경루가 있고 그 뒤로 대웅보전, 좌우에 명부전과 삼성각이 배치된 모습.

근래 세워진 백련사사적비 비각.

비신은 조선 숙종때 세워졌으나 귀부와 머릿돌은 고려때의 것이라고.

이젠 만덕산 자락을 걸어 다산초당에 가야지요.

다산초당까지는 오솔길을 따라 약 1km 남짓이니 유유자적하며 걸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
지난해 백련사와 다산초당 일원이 국가자연유산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니 이 길을 걷는다는게 더욱 뜻깊네요.

오호, 만덕산 자락의 동백숲이 일품이네요.
동백나무 9,000그루가 자생하고 있는 동백숲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고창 선운사 동백숲과도 비교될 정도로 대단한데요.
원래 고려말 원묘국사가 백련사를 중창하면서 화재로 부터 절을 보호하기 위해 동백숲을 조성했으니 역사가 무척 깁니다.

밀림처럼 우거진 동백숲에서 만난 부도밭.
붉은 꽃을 피운 동백숲에 서니 한 폭의 그림을 보는듯 하니 시라도 읊조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절을 에워싸듯 동백나무가 밀림을 이루어 아름다웠고 그 안에 차분히 서있는 여러 기의 부도들은 너무 경건한 나머지 장엄하기까지.

동백숲에서 만나는 부도들.
여는 절의 부도와는 달리 다소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동백숲에서 바라보이는 구강포.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곤 하니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애잔하며 뭉클합니다.ㅎㅎ

백련사 차밭도 큰 볼거리.
불가에서는 차(茶)를 만들어 마시는 과정 자체를 명선(茗禪)으로 일컬을만큼 스님들이 애호하는 수행의 한 방편이니 그 역사가 매우 깊다고 합니다.

경사진 길은 다산 정약용과 백련사 혜장스님이 서로 오가며 교류하던 길.
다산은 혜장을 만나 차를 즐기며 인간적인 대화에서 부터 학문적인 토론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또한 혜장은 다산에게 경학을 배우며 다산으로 하여금 차를 알게 하였다지요.

이 길을 처음 걸은지도 어언 40년 가까이 되었고 몇번이나 걸었는지도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친근하지요.
다산, 혜장의 체취가 남아있는 조용하고 차분한 숲길을 걸으려니 너무 기쁘네요.

혜장은 다산보다 10살 연하였고 승려였지만 유학에도 조예가 깊고 시도 뛰어 났다고 하며 다산은 혜장을 통해 차를 알게 되었고 그후 초의선사와도 교류하게 되었다고.

숲길을 걸은지 30분만에 도착한 천일각.
다산이 흑산도로 유배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구강포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세운 정자.

드디어 다산초당에 처음 만난 동암(東菴).
동암은 평소 다산이 기거하던 건물이며, 초당에서는 제자들을 가르쳤고, 서암은 제자들의 숙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다산의 생활공간이었던 동암(東菴).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며 다산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뜻으로
추사는 다산보다 24년 연하였지만 평소 몹시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 옆의 '다산동암(茶山東菴)'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이라고.

오호, 다산초당은 마침 주말이라 답사객으로 가득.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생활중 11년을 머물며 후진을 양성하고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이지요.
다산이 1808년 봄, 윤단(尹慱)의 정자에 놀러 갔다가 아늑하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경치에 반한 나머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의 흔쾌한 허락으로 마침내 거처를 삼게 되었다는 후문.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류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강진 읍내의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47세이던 1808년 봄,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귤동의 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1818년까지 거처하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당초에는 작은 초가집이었지만 1957년 기와집으로 크게 복원하여 다소 아쉬운 실정.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
다산을 존경하던 추사가 직접 쓴 글씨라고 합니다.

아담한 연못과 작은 정원으로 꾸민 연지석가산.
다산은 정성을 다해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단장하며 다산초당을 일구며 자신을 다산초부(茶山樵夫)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다산초당 마당에 있는 다조(차 부뚜막).
다산이 약천의 물을 떠서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차를 끓이던 바위.

초당 옆 산자락에는 동백숲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요.

다산이 손수 쓰고 새겼다는 정석(丁石) 두 글자.
두 글자에 담긴 뜻은 다산 정약용만이 알 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네요.

다산이 평소 물을 마시거나 차를 끓일때 사용하던 샘인 약천.
주위에 정성스럽게 돌을 쌓아 만든 샘터로 모두 다산의 손길이겠지요.

초당 옆의 작은 건물은 서암.
윤종기 등 18명의 제자가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인데 번듯한 기와집으로 복원한 모습이 영 낯서네요.

다시보는 다산초당의 현판들.
다산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 동암에 걸린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이고
동암의 '보정산방'은 추사가 쓴 글씨이며 서암에 걸린 '다성각'은 추사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고 합니다.

귤동마을로 내려가면서 만난 석조.
다산과 제자들이 초당에 오가며 손도 씻고 쉬어가던 곳이겠지요.

하산길에 만난 제자 윤종진의 묘.
윤종진은 18명의 제자중 막내였다고 하는데 다산초당으로 숙소를 옮겼을 당시 6살 꼬마로 형들과 글공부를 시작해 다산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고.

대숲길을 걸으며 오늘 답사여행을 마무리.

시간관계상 다산기념관을 방문치 못함은 다소의 아쉬움이기도.
다산 정약용과 혜장선사의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는 강진 만덕산을 찾아 백련사, 다산초당을 답사하고 밀림을 이룬 동백숲도 음미하는 아름다운 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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