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양주 한강변 다산 정약용유적지와 실학박물관, 다산생태공원 탐방강바람의 국내여행 2026. 6. 2. 16:42
남양주 한강변 다산 정약용유적지와 실학박물관, 다산생태공원을 찾았습니다.
다산 유적지는 서러운 유배생활을 한 전남 강진이 대표적이지만 아무래도 생가와 묘소가 있는 남양주 마현이 우선일것 같은데요.
이곳에는 생가인 여유당, 묘소 외에 문도사,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이 있고 그가 사랑하던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어 더욱 애절하기 까지 하지요.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이며 서화가로서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사암(俟菴), 여유당(與猶堂), 채산(菜山) 등이 있습니다.
다산의 학문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성호 이익이었으며 다산을 보호해준 방패막이는 바로 정조였고 18년 유배생활을 지원하고 저술활동을 도와준 이는 강진의 해남윤씨였습니다.
특히 정조의 총애를 받던 1789년(정조 13) ~1800년(정조 24)까지의 10여 년이 다산의 전성기라고 할수 있는데요.
정조가 별세한 이후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었고 57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저술을 수정, 보완하는데 힘쓰며 자신의 학문과 생애를 정리했는데요.
이때 미완으로 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고 흠흠신서를 저술했으며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짓기도 하였으며 시간이 나면 한강을 유람하며 한가로이 유유자적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산 이야기를 한편의 블로그에서 하자니 참으로 이치에 맞지도 않고 주제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2003년, 박석무 선생이 발로 뛰며 엮은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를 읽어보심이 가장 구체적이고 감동적일 같네요.
읽을때마다 다산을 다시 만날수 있으니 시간내어 다시 탐독하고자 합니다.
이 참에 그의 출생, 가족관계를 살펴보고자 하는데요.
1762년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나주정씨인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03~1792)과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의 5남3녀중 4째 아들로 태어났고 같은 집에서 1836년 향년 73세로 별세했습니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냈으며 부인이 계속 요절함에 따라 3명의 부인을 두게 되었는데 다산의 어머니는 둘째 부인으로 해남윤씨인 공제 윤두서의 증손녀입니다.
정약현, 약전, 약종, 약용 등 형제들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인물들이었는데요.
맏이 약현(若鉉, 1751~1821)은 이복형으로 황사영의 장인이며 딸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유배당했으나 정작 본인은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천주교를 받아들이지않아 체포나 처벌을 면했다고.
둘째 약전(若銓, 1758~1816)은 김범우 집에 세운 조선 최초의 천주교회에서 동생 약종, 약용, 이벽 등과 함께 종교활동을 하며 조선 천주교 전파의 핵심적 역할을 했던 인물.
1801년 신유박해에 연류되어 흑산도 유배생활중 자산어보를 지어 유명하며 홍어 상인 문순득을 만나 필리핀까지 표류하다가 극적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담은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쓰기도.
세째 약종( 若鍾, 1760~1801)은 우리 천주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신유박해 당시 약전, 약용과 달리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큰아들 정철상과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함께 순교한 인물.
부인 유 체칠리아와 딸 정정혜도 순교자이며 차남 정하상은 우리 최초의 신부가 되기 위해 30년 동안 동정을 지켰지만 1839년 기해박해때 순교하여 103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고.
네째가 막내 정약용이며 다섯째는 이복동생이 있습니다.
결국 동복형인 약전, 약종과 친인척들이 천주교로 인해 순교를 당하거나 유배를 가기도 하며 집안 전체가 풍비박산되었네요.
깨끗하고 맑은 세상을 꿈꾸었던 위대한 실학자이자 사상가인 다산 정약용을 다시 음미해 보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남양주 한강변 다산유적지와 다산생태공원을 찾았습니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95-4에 위치한 다산유적지와 묘소 전경.
운길산 남쪽에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고 마재가 위치한 옛부터 유명한 명당터로 알려져 있지요.
다산유적지에는 생가인 여유당, 묘소, 문도사,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이 있고 그 뒤로 그가 사랑했던 예봉산, 수종사가 보입니다.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여유당과 잠들어 있는 묘소.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인 실학자이며 서화가로서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 사암(俟菴), 여유당(與猶堂), 채산(菜山) 등이 있습니다.
이외에도 호가 더 있다고 하니 호에 대한 욕심이 많은가 봅니다.ㅎㅎ

잘 정비되어 있는 다산유적지 앞 길.
돌에 새긴 다산의 저서, 거중기 전시모형 등이 설치되어 있지요.

생가 앞에 전시모형으로 만든 거중기(擧重器).
1792년(정조 16) 다산이 밧줄과 도르레를 이용하여 물건을 들어올리도록 고안한 기구로 수원화성 축조때 사용하였다고.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
다산이 태어나고 생을 마친 곳으로 처음과 끝을 함께 한 장소로 당시의 마현리는 마재, 소내, 소천, 열상 등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요.
본래부터 있던 집은 1925년 을축대홍수때 강물의 범람으로 떠내려가 없어지고 1986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한 집입니다.
지금은 집 주위가 공원처럼 넓게 조성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 봅니다.

서쪽에서 바라본 여유당의 사랑채 모습.
18년의 유배생활을 마친 다산은 1819년 10월, 오랜만에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왔지만 백형 약현(若鉉)만 남아있을뿐 부모형제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집은 쇄락한채 있었다고 합니다.
다산은 여유당에서 17년 동안 학자들과 교유하며 또 저술을 정리하며 지내다가 부인 풍산홍씨의 회혼일을 맞아 자손과 친척들이 모인가운데 깊은 잠에 들었다고 합니다.

18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생가로 돌아와 사랑채에 건 '여유당(與猶堂)' 현판.
다산은 유배지에서 얻는 호이고 여유당은 마재(마현)에서 만년을 보낼때 지은 호인데요.
겨울냇물을 건너듯 신중하고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 늘 방패가 되어주던 정조가 떠나면서 다산이 느꼈을 불안한 마음을 표현한다고.

여유당의 사랑채 모습.
다산은 여유당에서 편안한 만년을 보내려고 노력했겠지만 유배생활중 형제들이 천주교로 인해 죽임을 당하고 집안도 풍비박산되었으니 얼마나 참담하고 슬펐을지 가슴이 아프네요.

사랑채 내부 모습.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지만 이렇게 방이 길게 있었는지는 의문??

두루마기와 보료가 있는걸로 보아 다산의 침실로 보입니다.

북쪽에서 바라본 여유당의 안채.

여유당의 안채 모습.

그런데 묘 주변의 울창하던 노송들이 이상스레 휑한 모습을 하고 있네요??
2년 전 겨울, 습설이 많이 왔을때 소나무 피해가 컷다고 합니다.
추가 피해를 막고자 강전지를 하여 묘 일대가 무척 황량한 모습이니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 흑흑~!

유산(酉山) 자락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1762~1836) 묘 전경.
마재마을에서 태어나 74세로 나이로 생을 마감하며 집 뒷산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자리잡은 곳인데요.
1970년 대에 묘 정비공사를 하며 앞쪽에 석축을 쌓고 터를 넓혀 당초의 모습이 다소 바뀌었습니다.

부인 풍산 홍씨와 합장되어 있는 다산 정약용 묘소.
과거의 석물은 아쉽게도 남아 있지 않으며 오른쪽의 큰 묘표는 1974년에 정씨종친회에서 건립하였고, 묘 앞의 묘표는 1959년 다산선생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입니다.

묘에서 생가인 여유당을 바라보며
늘 깨끗하고 바른 세상을 꿈꾸었던 다산의 정신이 언제쯤 실현될수 있을지 암담한 시절을 곱씹어 봅니다.

묘에서 바라보이는 한강.
바로 아래에 살던 집이 있고 그 앞에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이 바라보이니 자칭 열상노인(한강상류의 늙은이)으로 얼마나 편안하게 잠들어 계실지 다행스럽습니다.

문도사(文度祠)는 다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으로 다산의 사상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1910년(윤희 4), 순종은 다산을 정헌대부 규장각제학으로 추증하고 문도(文度)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다산기념관은 아쉽게도 보수중으로 폐쇄상태.

다산 이야기를 하려면 끝이 없는데 박석무 선생이 발로 뛰며 엮은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가 가장 구체적이고 감동적인것 같더군요.
읽을때마다 다산을 다시 만날수 있으니 시간내어 다시 탐독하고자 합니다.

다음 찾은 곳은 다산유적지 앞에 있는 실학박물관.

실학박물관은 실학(實學)을 주제로 한 박물관으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실학자들에 대한 유물과 자료를 만날수 있는데요.

실학은 조선 후기의 개혁적, 실천적 학풍을 가리키며 대표적인 실학자는 이익(李瀷), 박지원(朴趾源), 정약용(丁若鏞), 김정희(金正喜), 박규수(朴珪壽) 등 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한도는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귀양 시절 제자 이상직에게 그려준 그림.
세한은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알수 있다는 논어에 나오는 말을 따서 지은 것으로 즉 사람은 고난을 겪은 후에 비로소 그 지조와 인격의 고귀함이 드러난다는 뜻이라고.

정두원의 조천기지도.
중국 사행과정에서의 견문을 기록한 책으로 명,청 교체기의 급변하는 동아시아 세계를 바라보는 지식인의 인식을 찾아볼수 있다고.

'수레'는 실학의 상징적 기물로 농업 생산력 향상과 상업의 발전을 위해 무척 중요하여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수레 사용을 강력히 주장했다고.
중국에서는 많이 사용하는 수레를 우리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산 생가 앞을 흐르는 한강을 바라봅니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닌 드넓은 모래사장이 집 앞에 끝없이 펼처져 있었지요.
한강의 옛 이름은 '열수(洌水)'인데 다산이 말년에 열수라는 호를 쓴건 한강을 사랑하고 수운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

다산이 열수(한강)에 남다른 애착을 갖는건 어릴때부터 형제들과 백사장에서 함께 놀았으며 성장해서는 소내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양이나 천진암에 다니던 추억이 있었기 때문.

예전에 생가 앞을 흐르던 한강은 1973년 팔당댐 준공으로 담수되어 내륙의 바다가 되고 말았네요.
과거에 배를 타고 우천리, 분원리 방향으로 한강을 건너려면 백사장을 한참이나 걸어야 했고 강물은 여울처럼 급하게 흐르던 시절이 있었지요.
드넓은 모래사장은 물속에 잠기었고 그 당시의 광주 우천리는 사진처럼 섬이 되고 말았으니 옛 풍경을 상상하기가 쉽지않습니다.
본인이 어렸을때 이곳에서 끝없이 펼처진 모래사장을 보며 세상에 이렇게 넓은데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요.ㅎㅎ

여유당 앞에 조성된 아름다운 다산생태공원.

예전에는 모두 논, 밭으로 사용되던 강변이었는데 2012년 4대강 정비사업사업때 생태공원으로 조성한 역사가 있지요.
다산이 보았으면 세상이 이렇게도 바뀔수가 있구나 하며 감탄했을것 같습니다.ㅎㅎ

공원에 있는 다산의 생애 관련 설명판.
공원을 산책하면서 다산의 생애를 살펴볼수 있게 하여 아주 유익하네요.

남양주 한강변에서 깨끗하고 맑은 세상을 꿈꾸었던 위대한 실학자이자 사상가인 다산 정약용을 다시 음미해 보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강바람의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장산을 걸어 의릉, 홍릉숲, 영휘원, 숭인원, 청량사를 답사하다(2) (0) 2026.06.06 천장산을 걸어 의릉, 홍릉숲, 영휘원, 숭인원, 청량사를 답사하다(1) (0) 2026.06.06 가평 운악산 현등사(縣燈寺)를 탐방하다 (0) 2026.05.31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탐방 (1) 2026.05.31 여주 계신리마애불을 탐방하다 (0) 2026.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