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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와 정희왕후가 잠들어 있는 광릉(光陵)강바람의 유적답사 2026. 6. 24. 20:59
조선 제7대 세조(世祖)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가 잠들어 있는 광릉을 찾았습니다.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2남으로 진평대군, 진양대군, 수양대군을 거쳐 1453년(단종 1)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잡았으며 1455년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희왕후 윤씨(1418~1483)는 1428년(세종 10) 당시 진평대군이던 세조와 혼인하였고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는데요.
1469년 아들 예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당시 13살이던 손자 성종을 왕위에 올린후 조선 최초로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한 역사가 있습니다.
광릉은 세조가 세상을 떠난 1468년에 조성되었으며 15년 뒤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났을때는 동쪽 언덕에 릉을 만들면서 같은 능역에 있다고 하여 광릉으로 합치고 정자각도 중간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로써 광릉은 조선 최초로 같은 능역내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의 릉이 되었습니다.
세조는 왕권강화, 경국대전 편찬 등 치적도 많았지만 조카 단종을 비롯하여 사육신 등 많은 신하들을 죽인 죄가 컷지요.
그는 생전에 피부병으로 많은 고생을 했고 맏아들 의경세자가 19세에, 둘째 아들 예종은 20세의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는 아픔을 겪었는데요.
모든게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의 저주와 충신들을 무참히 죽인 업보로 생각됩니다.
광릉을 탐방하면서 아쉬움도 남는데요.
세조 릉과 정희왕후 릉 사이의 숲을 없애고 현재와 같은 이상스런 모양으로 복원한 것은 타당성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고요.
또한 조선왕릉중 유일하게 참도(향로와 어로)가 망실되어 없는데도 복원을 미루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며
마지막으로 재실 옆에 매몰되어 가는 연지는 준설 등 복원이 필요한 실정이니 연구검토를 바라고 싶습니다.
문화재를 원래의 제 모습대로 잘 관리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은 없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당국의 부단한 노력을 촉구해 봅니다.

봉선사천을 따라 광릉을 찾아 갑니다.

광릉 앞을 흐르는 봉선사천.
진접읍에서 광릉을 찾으려면 구불구불 봉선사천을 따라 들어가지요.

남양주 광릉은 조선 제7대 세조(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릉.

소박한 모습의 광릉 재실.

한옥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주는 재실.
재실은 왕릉을 지키는 참봉이 상주하며 제향을 지낼때에는 제관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집.

재실의 정문과 행랑채.

재실 옆에 있는 연지.
예전엔 이보다 컷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점차 매몰되면서 면적이 작아진것 같네요.

하마비가 서있는 광릉진입로.
릉지의 선정은 한양 100리 안에 하지만 광릉의 경우는 다소 먼거리인데도 세조가 생전에 잡아놓은 터라고 합니다.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새겨져 있는 광릉 하마비.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려라라는 뜻으로 조선왕릉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마비라고.

재실에서 광릉가는 진입로.
릉으로 가는 길의 양편으로 전나무숲이 울창하니 엄숙하고 경건하기까지 하네요.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전나무 고목들.
옛날을 회상해 보면 공해나 오래되어 죽어 베어낸 전나무가 무척 많으니 아쉽기도 합니다.

드디어 홍살문 뒤로 보이는 광릉.

운악산(275m) 능선의 남쪽 끝에 자리한 광릉.
광릉은 정자각을 기준으로 양쪽에 릉이 있는 조선 최초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기도 합니다.

홍살문을 지나면 좌측에 수라간, 우측에 수복방, 비각이 있으며 중앙의 정자각을 기준으로 좌측이 세조의 릉, 우측은 정희왕후 윤씨의 릉.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에는 참도(향로와 어로)가 있어야 하지만 망실된후 아직까지 복원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실정.

수라간 뒤로 바라보이는 세조의 릉.
예전에는 릉침(봉분)에 올라가 자세히 살펴볼수 있었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후에는 아예 접근조차 어려운 실정.
시민의 입장으로 보면 유네스코고 뭐고 다 필요없는기라.ㅎㅎ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재궁(관)을 두는 방을 석실 대신 회격으로 만들고 봉분에 두르는 병풍석을 생략하여 왕릉공사에 드는 비용과 인력을 절약했다고.

비각 뒤로 바라보이는 정희완후 윤씨의 릉.

높다란 사초지 위의 정희왕후 윤씨의 릉.

광릉 비각.

묘표에 새겨진 '朝鮮國/世祖大王光陵/貞喜王后祔左岡(조선국/세조대왕광릉/정희왕후부좌강)'

정자각 뒷편의 사초지 모습.
예전에는 릉과 릉 사이에 숲이 있었지만 2016년 옛 모습으로 복원한다며 숲을 없애고 돌더미가 드러난 땅으로 만든 현장.
마치 수해를 당한것 같기도 하고 발굴하다가 중단된 모습같기도 합니다.

광릉을 조성한 이후 현재까지 6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잘 있던 광릉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답시고 저런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않는 현실.
비슷한 모습의 목릉, 창릉, 선릉처럼 사초지라도 곱게 다듬어야 선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착잡하기만 하네요.

씁씁한 마음으로 공개중인 숲길을 걷기로.

한시적으로 공개중인 1.3km 거리의 복자기 숲길.

2년전에도 한번 걸었지만 이번엔 릉역 앞에서 시작하여 언덕을 넘어 재실 방향으로 내려가기로.
한시적으로 개방하는 복자기 숲길이라 더욱 소중한 생각이 드네요.

릉마다 봄, 가을에 한시적으로 숲을 개방하지만 평소에는 걸을수 없는 숲길이지요.

복자기 단풍이 곱게 물들 가을에 다시 찾을 것을 약속합니다.

재실 앞에 도착하여 오늘 광릉 탐방을 모두 마칩니다.
< 참고사진 몇장 올립니다 >

1930년 일제때 찍은 사진으로 당시에 수라간이 있었으나 전란을 겪으면서 없어졌다가 현재 다시 복원되었는데요.
중요한건 당시에도 참도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일제 이전에 망실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정자각 뒷편의 릉 사이에 숲이 보이질 않는데 지반이 훼손된 것으로 보아 수해를 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자각 뒷편으로 숲이 울창하던 예전 모습(2011년 본인 자료사진).
조선시대 부터 릉 사이에 이런 숲이 있었는지 일제때 나무를 심어 숲이 조성되었는지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문화유산 당국의 주장이 옳다하더라도 릉 사이에 숲이 울창하던 옛 시절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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