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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강변 원주 법천사(法泉寺)터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1. 7. 17:24
「원주 반계리은행나무를 본 후 부론면 남한강변에 있는 법천사터를 찾았습니다.
오호, 법천사터는 얼마만인가요?
1990년대 초, 남한강변의 거돈사터, 청룡사터, 흥법사터 등의 폐사지를 답사할때 처음 찾았고 이후에도 몇 차례 찾은 적이 있었는데 2001년 발굴이 시작된 후로는 처음인것 같네요.
그때는 키가 큰 옥수수밭, 담배밭 사이를 지나 서원마을에서 절터를 찾았고 산기슭의 지광국사탑비 근처에서만 유구를 볼수 있었지요.
이제 발굴이 모두 끝나고 깨끗하게 정비해 놓으니 무척 낯설기는 하지만 다행스럽다는 생각입니다.
절터는 발굴이 진행되면서 예전 강원도 시도기념물에서 사적 제466호로 승격되었고 세간의 관심도 높아져 반출되었던 지광국사탑(부도)이 원래의 자리인 법천사 절터로 옮겨 올것이라는 소식도 들리네요.
진리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법천사(法泉寺)는 통일신라 725년(성덕왕 24) 창건되었으며 고려 문종때 지광국사(智光國師)가 이곳에 머물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柳方善)이 머물면서 강학하였는데 이때 수학한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권람 등이 탑에 그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임진왜란때 전소된후 중창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금당터 윗쪽에 있는 국보 제 59호인 지광국사탑비는 높이 455cm로서 비면 주위에는 아름다운 국화문양을 조각하였고 좌우 양쪽에는 각각 두 마리의 나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11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힙니다.
원래 이 탑 앞에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탑(부도)이 있었는데 1911년 일본으로 반출되는 참화가 있었지만 국내 여론으로 다시 반환되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전시중이며 조만간 옛 위치인 법천사 절터로 돌아올 전망입니다.
법천사터는 2001년부터 15년간 10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이때 절터에 있던 서원마을이 이전되었고 마을 주민들이 농사짓던 밭은 대부분 절터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황량하고 고즈녁하던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발굴 결과 예전의 화려했던 법천사의 규모를 가름해 볼수 있으니 더욱 값진 여행이 된것 같습니다.
가을에 찾은 법천사터, 꿈많은 젊었던 옛 시절을 추억케 하네요.
"아름다운 절정, 영혼이 머문 자리" 안내문에 의하면,
「법천사 지광국사탑(국보 제101호)터.
이곳은 고려시대 고승 해린 스님의 유해를 모신 지광국사탑이 있던 자리이다. 탑의 이름은 현묘(玄妙)이다.
984년 원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승려로서 최고지위인 왕사, 국사가 되어 온 백성과 왕의 존경을 받았다.
1070년 10월, 스님이 돌아가시자 법천사 동편 산기슭에서 다비를 하였다. 1085년, 왕실과 스님의 제자 그리고 고려 백성들은 정성을 다해 아름다운 탑을 세워 스님의 유해를 모시고, 비석에는 스님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아름다워서 슬픈 영혼을 위하여.
이 탑은 우리 민족의 수난과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수탈되어 현해탄을 건넜고, 한국전쟁 때에는 포탄에 온 몸이 찢어지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 쓰라린 역사에서 스님의 영혼이 어느 한 순간인들 편한 날이 있었으랴!
제 자리를 떠난지 100여년, 아름다워서 슬픈 탑과 탑비, 스님의 영혼이 이제 이곳에서 다시 만나 아픔이 영원히 치유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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