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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이성산성(二聖山城)을 답사하다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0. 15. 07:49
하남시 이성산(210m)에 쌓은 이성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한 포곡식 산성으로 사적 제422호!
현지 안내문에 따르면,
「이성산성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북쪽 방향으로 내려오는 줄기와 만나 길게 맥을 이루는 금암산의 줄기와 맞닿아 있다.
산성의 남쪽에는 평야를 둘러싼 높은 산들이 있고 북쪽에는 작은 언덕만 있어 주변 지역을 한 눈에 내려다 볼수 있으며 뒷편 평야지역을 방어하고 강 너머의 적으로 부터 한강유역을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지점이다. 높이 2m, 둘레 약 1,844m, 총면적 약 231,313㎡ 규모로 돌로 쌓은 석축성이며, 계곡을 둘러서 포곡식 산성이다.
이성산성의 성 내외부는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하면서 삼국시대 건물터(8각, 9각, 12각, 장방형건물터)와 저수지, 문터, 배수구 등이 확인되었고 벼루를 비롯하여 흙으로 만든 물건과 그릇, 기와,목간, 철제마 등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들은 대체로 6~8세기무렵의 신라 토기가 주를 이루며 3차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목간에서 608년으로 추정되는 '무진년(戊辰年)'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음이 확인되었다. 백제 또는 고구려가 성을 처음 쌓은 세력이라는 학설도 있으나 대체로 신라가 쌓고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다른 현지의 안내판에 의하면,
「백제가 처음 축조하고 그 후 고구려와 신라가 보축하여 사용하였다는 설명.」
지식백과 내용을 요약하면,
「산성에 서면 낮은 산임에도 불구하고 3면으로 한강이 잘 조망되어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실감케 하며 그간의 발굴결과와 출토유물로 볼때 신라가 6세기 중반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는데 그때의 치소가 광주 일대로 추정되며 그 치소성이 바로 이성산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산성을 답사해 보면 성곽은 대부분 없어지고 동문터와 발굴지역만 일부 남아 있을 뿐이어서 정말 산성인지도 불투명할 정도인데요.
발굴 결과 건물터라고 하는 곳에는 주춧돌로는 보기 어려운 돌덩어리만 놓여 있어 8각이니 9각이니 12각이니 하는 소리가 공허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동문터가 확실하고 안에 저수지가 남아 있으니 산성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하겠습니다.
일찌기 다산 정약용은 이 산에 올라 이성산성임을 확인하고 남쪽지역(교산동 일대)을 하남위례성의 옛 터로 비정하는는 등 매우 중요시 하였으며
20여년전, KBS 일요스페셜에서는 이성산성의 8각건물터가 우리나라 최초의 제사유적이라고 방영한 일이 있으니 중요한 산성 유적임에는 틀림없는것 같습니다.
이성산성을 살펴보면서 개인적으로 백제 하남위례성과 관련된 유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발굴에 참여한 역사학도들이 상상력이 너무 풍부하여 신라때 쌓았느니, 우리나라 최초의 제사유적이니 하는 주장들은 앞으로 좀 더 세심한 검토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성산성을 답사하며 궁금증이 증폭됩니다.
현지 설명에 따르면,
「9각건물터는 9라는 숫자가 완전무결함을 의미하는 하늘의 숫자이므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천단(天壇)으로 볼수 있고,
9각건물터와 대칭되는 지점에 있는 8각건물터는 8이 땅을 상징하는 숫자이므로 지신(地神)에게 제사지내는 사직단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도대체 무얼 근거로 하는 소리인지 일본의 사학자가 자기 나라의 유적지를 보고 하는 소리를 무분별하게 갖다 붙인것 아닌가요?
발굴 성과를 과장하기 위해 너무 상상 속의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닌지 성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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