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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해협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1. 25. 21:12
2020.11/23(월) 강화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를 답사하였습니다.
강화는 해안을 따라 많은 진, 보, 돈대를 쌓아 외세에 대비하였는데 조선 숙종 당시 5개의 진, 7개의 보, 53개의 돈대, 8곳의 포대, 8개의 봉수 등이 있었다고 하며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따라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진입니다.
강화는 한양(서울)과 가까운 길목으로 예전부터 피난처로, 외세와의 격전기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요.
1636년 병자호란때에는 강화가 완전 함락 당한 적이 있었고
근대에 들어 프랑스인들의 병인양요(1866), 미국인들의 신미양요(1871), 일본인들의 운요호사건(1875) 등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기도 했지요.
그들은 조선을 통채로 삼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인명살상을 했고 이도 모자라 옛 무덤들을 도굴했고 민가를 약탈하고 귀중한 도서들을 훔쳐가기도 했습니다.
사적 제225호, 초지진(草芝鎭)은 당초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인데 가장 남쪽에 있어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사건 등 제국주의 침략때 맨 처음 적과 싸웠던 격전지입니다.
1871년 4월23일, 미국 로저스가 지휘하는 아세아함대가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여 450명의 육전대가 초지진에 삼륙을 감행하여 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모든 시설이 파괴된 적이 있었고
운요호사건(1875)때에는 왜에 패함으로써 강압으로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은 일본에 예속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초지진의 노송에는 당시 외세가 쏘았던 포탄의 흔적이 남아 있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사적 제226호, 덕진진(德津鎭)은 초지진과 광성보 사이에 위치하여 가장 중요한 요새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 숙종때 축조된 덕진돈대, 남장포대가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병인양요때에는 양헌수장군의 부대가 이 진을 통해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군을 섬멸했고, 신미양요때에는 미국함대와 격전을 벌여 큰 피해를 주기도 했습니다.
미군은 당시 "남북전쟁때에도 이와같은 짧은 시간내에 맹렬한 포격을 받아보지 못했다"며 패자의 변을 기록하고 있다고.
덕진진 북쪽에 있는 광성보(廣城堡)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가장 규모가 큰 요새로서 용두돈대, 손돌목돈대가 소속되어 있으며
병인양요, 신미양요때 치열한 격전을 치룬 현장이기도 합니다.
신미양요때 어재연장군은 전 수비군을 이끌고 신무기로 무장한 적들과 용감하게 싸웠지만 역부족!
자신과 동생 어재순 그리고 200여명의 군사는 4월23일부터 다음날 까지 48시간의 사투를 벌였으나 모두 전사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이들 장병들은 포로가 되느니 최후까지 나라를 위해 몸바치겠다는 결의로 싸우다 전사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가슴 뭉클하게 하네요.
손돌목은 강화 덕진진에서 김포 신안리를 마주 바라보는 좁은 해협으로 슬픈 전설이 전해 집니다.
고려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피난을 할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해 초지(草芝)의 여울로 배를 몰았는데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손돌의 목을 베도록 하였다.
이때 손돌은 자신이 죽은뒤 배에 있는 박을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험한 물길을 벗어날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으며
왕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강화로 피할수 있었으며, 왕은 손돌의 충성에 감복해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영혼을 위로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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