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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신태인읍 화호리, 일제강점기의 옛 구마모토 농장강바람의 국내여행 2024. 7. 11. 09:00
정읍 신태인읍 화호리, 용서마을에 있는 일제강점기 옛 구마모토 농장을 둘러 보았습니다.
화호리(禾湖里)는 벼가 호수에 이르다라는 뜻으로 드넓은 곡창지대를 말하는데요.
부안, 김제, 정읍 등 주변 지역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는 화호리는 기름진 호남평야의 중심부에 있어 동양척식이 일본인 농업이민정책을 추진할때 최적의 이주지로 꼽았던 곳입니다.
1912년 신태인역이 생기면서 하호리에는 쌀을 욕심내는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는데요.
구마모토, 다우에 등 다수의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동척의 지원하에 땅을 사들이거나 고리대금업으로 땅을 빼앗아 대규모농장을 조성했지요.
일본 나가사키현 출신인 구마모토는 전북에 진출한 최초의 일본인 지주.
그는 숙구지(宿拘地)라고 하여 개가 편안하게 잠을 자는 모양이라는 화호리 언덕에 농장과 집을 지었고 가장 악랄하게 조선인들을 수탈했는데요.
궁핍한 조선의 소작농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면 토지를 빼앗는 방식으로 땅을 넓혀 나갔다고 합니다.
일제때에 지어졌던 그들의 시설물들은 노후로 많이 사라졌지만 구마모토 농장의 일본인 농장가옥, 화호자혜진료소, 일본인직원사택 등은 아직 남아 있어 수탈의 현장을 살펴볼수 있으니 다행스럽다는 생각.
정읍근대역사관에서 그들의 수탈역사의 증거들을 살펴보고 당산나무 언덕 일대를 걸으며 구마모토 농장의 창고, 사택 등 흔적들을 살펴 보았으니 무척 유익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를 찾아 갑니다.
신태인읍 화호리를 찾은 이유는 일제강점기 구마모토 농장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함.
지금도 당산나무 언덕 아래에 남아 있는 옛 흔적들을 볼수 있어 농촌지역의 식민지 수탈사를 가감없이 증언하고 있지요.
앞에 보이는 문기둥은 일제때 구마모토 농장의 정문으로 사용하던 흔적.
화호리, 용서(龍瑞)마을은 마을 서쪽에 용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종합안내도에 의하면
"용서마을은 신태인읍의 주요 곡창지대인 화호리 일대를 배경으로 일본 근대식건물이 보존되어 있는 마을로 당산나무 언덕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농촌지역의 식민지 수탈사를 가감없이 증언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근대문화유산(일제강점기 화호병원, 화호우체국, 일본인 농장주 '구마모토'가옥, 농산과장 사택, 일본 근대식건물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마을이다".
정읍근대역사관으로 변한 구마모토 농장의 쌀창고.
일제때 화호리 일대에서 생산한 엄청난 양의 쌀을 보관하던 구마모토 농장의 쌀창고였으며 창고에 모였던 쌀은 기차편으로 신태인역, 군산역을 거쳐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지요.
당시 마을에 쌀창고가 5동이나 있었으나 6.25 사변때 4개동은 소실되고 본 건물만 남게 되었다고.
해방 후 1947년에 화호중앙병원, 1960년에 화호여고를 거쳐 2021년에 정읍근대역사관으로 재탄생한 역사가 있습니다.
구마모토와 다우에의 수탈 기록들.
일본 나가사키현 출신인 구마모토는 전북에 진출한 최초의 일본인 지주.
안내문을 보니 정말 기가 막히네요.
"1902년 화호리에 진출한 구마모토는 명당자리에 사택과 창고 등을 설치하여 정신적, 물질적으로 주민들을 수탈했다.
그의 농장은 화호리 일대뿐만 아니라 5개 군(정읍, 김제, 옥구, 완주, 부안) 26개 면에 걸쳐 있었으며 1930년대 그가 소유한 토지는 3,500정보(350만평)에 달했다. 1937년에는 주식회사 웅본농장을 창설하여 개인으로서는 전북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그는 고율의 소작료를 받은 것으로 유명했는데 상금제도를 만들어 소작농들을 경쟁시켜 실제보다 수확량을 부풀리게 만들었고 이를 근거로 고율의 소작료를 책정했다.
구마모토 다음 가는 지주는 다우에 타로였다.
다우에는 225정보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소농으로 시작하여 대농장주까지 올라선 자였다. 그는 일본에서 저리로 대출받아 조선인들에게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이를 갖지 못하면 땅을 압류하여 받아가는 방법으로 토지를 늘렸다.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에 있으면서 마름을 두고 농장을 관리했던 구마모토와 달리 다우에는 화호리에 살면서 농민들을 수탈했는데 그 수법이나 행동이 간교하여 세간의 평은 매우 나빴다."
부언설명을 하자면 구마모토는 1902년 화호리에 진출했고 일제 말기에는 만경강, 동진강 일대에 소유한 땅이 1,200만평이나 되었다고 하니 혀를 내두를수 밖에~!
다우에는 1913년 화호리에 진출했다고 하며 그가 지어 살던 2층의 농장사무실 겸 가옥(화호리 335)은 해방 후 화호우체국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폐가가 되어 있다고 하네요.
근대농촌문화유산의 땅, 화호리.
일제의 수탈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화호리를 찬찬히 살펴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네요.
일제에 의한 수탈의 역사를 말해주는 증거들.
좁은 골목을 걸으니 화호리 언덕 위에서 만나는 구마모토 가옥(국가등록문화재 제215호).
이 건물은 전북 최대규모의 농장을 소유했던 일본인 지주 구마모토가 사용하던 집으로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주택 앞면 왼쪽은 사무용 건물이 나와 있고, 오른쪽 뒷편으로 일본인 경리과장이 거주하던 건물이 배치되어 두채가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
농장 전체를 내려다 볼수 있는 높은 지점에 대지주의 저택을 지었으니 유럽의 화려한 성채와 모습이 흡사한것 같습니다.
화호리는 마을은 오랫동안 숙구지(宿狗地)라고 불렀는데 마치 개가 편안하게 잠을 자는 모양과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었지요.
그중에서도 마을 명당은 개의 주둥이 부분인 언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일본인 대지주가 차지하고 말았네요.ㅎㅎ
구마모토 가옥은 2채의 집이 연결되어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왼쪽은 일본인 지주의 가족들이 머물고 오른쪽은 일본인 경리과장이 머물렀다고 합니다.
수탈의 역사를 증명하는 건물이 아직 남아 있음에 안도.
일본건축물의 특징이 잘 남아있는 나무벽 모습.
구마모토 가옥의 내부 모습.
다다미가 깔린 넓은 방과 거실을 갖춘 부유한 일본집의 전형을 보는것 같네요.
최근 보수공사로 말끔해진 상태로 그들은 이사할때 크기의 서로 같은 문짝, 다다미 등은 떼어간다는 해설사의 설명.
구마모토 가옥내의 2가구를 연결하던 복도.
화호리 언덕 위의 당산나무.
옛부터 화호리 주민들의 소원을 비는 당산제가 거행되는 곳이었지만 일제때에 맥이 끊긴채 구마모토 가옥의 정원이 된 역사가 있지요.
화호리 언덕에서 바라본 드넓은 호남평야.
구마모토 농장은 신태인을 비롯하여 부안, 군산까지 전북 최대의 넓은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산나무에서 바라본 구마모토 가옥.
내륙쪽은 목재, 해풍이 부는 바다 쪽은 적벽돌로 지은 모습.
구마모토 가옥 뒷편의 언덕.
일제때만 해도 아무도 오르지 못하게 했겠지만 지금은 주민 휴식공간으로 활용중.
언덕 위에서 바라본 구마모토 가옥.
언덕에서 반대편으로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마을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당시 일본인 사택들.
내가 어렸을때에 충남 아산에서 이렇게 크고 마당도 넓은 적산가옥에 살았는데 갑자기 옛 생각이 나네요.
아버지는 어렵게 큰 집을 마련하신후 서울로 돈벌러 가시고 어머님은 농사지으며 어린 삼남매를 키우셨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요. 흑흑~!
구마모토 농장의 농산과장 사택.
실질적으로 농장을 관리하던 사람은 경리과장, 농산과장이었는데 경리과장은 구마모토 가옥에서 거주했고 농산과장은 이 집에서 살았다고.
마을에 남아 있는 당시의 일본인 사택.
지은지가 100년 가까이 되니 수명이 얼마남지 않아 보입니다.
화호리 일대를 찬찬히 둘러보지 못한채 당산나무 언덕 주위의 용서마을만 돌아보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다시 찾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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