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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130주년 기념, 정읍의 혁명유적지 탐방강바람의 국내여행 2024. 7. 11. 09:31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기념하여 정읍의 혁명유적지를 탐방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조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부패한 지도층과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여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입니다.
어릴때만 해도 동학난으로 배웠는데 세월이 흐르며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네요.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기는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동양의 맹주를 자처하게 되었지요.
동학농민혁명 이후 외세에 의해 청일전쟁, 러일전쟁, 민비 시해, 고종의 아관파천 등의 참으로 어이없는 사건들이 이 땅에서 벌어졌으니 조선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운 시기를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배들평 농민들은 예로부터 정읍천 아래에 예동보를 막아 농사일에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 보는 가뭄이 들어도 풍년농사를 지을수 있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부군수 조병갑은 동진강, 정읍천 합류부 아래에 새롭게 만석보를 쌓은건데요.
보를 쌓으면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나무를 마구 베어다 썼으며 농민들을 동원하여 일을 시키고 임금을 한푼도 주지 않아 많은 원성을 샀지요. 또한 보세(洑稅)라 하여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삼아 1894.1월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헐어 버렸는데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초가 된것입니다.
정읍에서 찾아볼 주요 유적지는 황토현전적지, 사발통문작성지, 김개남장군 고택지, 김개남장군 피체지, 말목장터와 감나무, 정읍 전봉준 유적, 전봉준 단소, 만석보혁파선정비, 만석보터, 고부관아터, 백산성 등이지만 시간관계상 유적지를 모두 볼수가 없으니 몇군데만 둘러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탐관오리의 잘못으로 농민들이 봉기하고 외세의 힘을 빌어 진압했다가 결국 나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 들었으니 참으로 비통함을 금할길 없네요.
동학농민혁명의 참 정신을 상기하며 다시는 이 땅에 거듭하여 불행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1년만에 다시 정읍 신태인을 찾았습니다.
오늘 여행은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탐방하는 일.
아름답지만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 길은 이평(배들)으로 가는 말목장터로.
이평의 말목장터와 신태인을 연결해 주는 도로이지요.
정읍땅을 유유히 흐르는 동진강 ~!
동진강에서 바라본 만석보쉼터.
동진강 신태인대교를 건너면 만석보쉼터.
만석보쉼터에서 보는 정읍시 관내 동학농민혁명 주요 유적안내판.
주요 유적지는 황토현전적지, 사발통문작성지, 김개남장군 고택지, 김개남장군 피체지, 말목장터와 감나무, 정읍 전봉준 유적, 전봉준 단소, 만석보혁파선정비, 만석보터, 고부관아터, 백산성 등
오늘은 시간관계상 유적지를 모두 볼수가 없으니 몇군데만 둘러봐야할것 같네요.
쉼터 정상에서 바라본 만석보 전경.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동원하여 쌓았던 만석보의 위치는 동진강과 정읍천이 합류하는 곳이었지요.
만석보 축조 당시의 구불구불했던 동진강과 일제때 직강화 후의 동진강은 전혀 다른 모습일테니 만석보터의 실제위치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네요.
동진강, 정읍천 합류부에 조성한 만석보쉼터.
언덕으로 조성하여 정읍과 동진강, 정읍천 일대를 조망하기 좋게 하였네요.
만석보쉼터의 정상부.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안내판을 보며 만석보터를 살필수 있게 하였네요.
동진강, 정읍천 주변의 광활한 호남평야.
1893년 동진강과 정읍천 합류부에 만석보를 쌓으며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지요.
당시의 동진강, 정읍천은 이런 모양이 아니었지요.
당시는 구절양장처럼 매우 구불구불한 모습이었는데 일제때 직강화시켜 오늘의 모습이 된것이므로 만석보의 위치는 종 더 고증이 필요하다는 개인적인 생각.
배들평 농민들은 예로부터 정읍천 아래에 예동보를 막아 농사일에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 보는 가뭄이 들어도 풍년농사를 지을수 있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부군수 조병갑은 동진강, 정읍천 합류부 아래에 새롭게 만석보를 쌓은건데요.
보를 쌓으면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나무를 마구 베어다 썼으며 농민들을 동원하여 일을 시키고 임금을 한푼도 주지 않아 많은 원성을 샀지요. 또한 보세(洑稅)라 하여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이 전봉준을 지도자로 삼아 1894.1월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헐어 버렸는데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시초가 된것입니다.
만석보쉼터에서 바라본 신태인.
동진강을 건너 신태인과 이평을 연결하는 도로와 넓은 농경지가 대단합니다.
만석보쉼터에서 바라본 이평(배들).
정읍천 만석대교를 건너면 이평면이며 왼쪽에 예동마을, 뒷편 중앙부에 말목장터가 있는 면소재지가 보입니다.
만석보쉼터에서 바라본 정읍천.
강처럼 넓은 정읍천은 내장산에서 발원하여 정읍의 중심부를 경유하여 이곳에서 동진강과 합류합니다.
정읍천 끝지점에 있는 만석보유지비.
만석보는 헐려 없어져 아무런 흔적도 찾을 길은 없고 유지비가 대신하고 있는데요.
탐관오리의 잘못으로 농민들이 봉기하고 외세의 힘을 빌어 진압했다가 결국 나라가 멸망의 길로 접어 들었으니 참으로 비통함을 금할길 없네요.
만석보의 위치를 보여주는 그림.
정읍천 끝지점에 광산보가 이미 있었지만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 조병갑이 동진강, 정읍천 합류부 하류에 만석보를 축조하였으며 1894년 농민군이 혁파하고, 1898년 고부군수 안길수가 완전철거하였다는 내용.
정읍 동학농민혁명 샘솟길.
동학혁명유적지를 둘러볼수 있는 샘솟길, 조만간 시간내어 반드시 걸어야 할 여정이네요.
이평 말목장터를 찾아 가는 길.
얼마나 많은 농민군들이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길을 달려 갔을까요!
드디어 낮으막한 언덕 위에 말목장터가 위치한 이평면에 도착.
4개의 길이 X자로 교차하는 정읍시 이평면은 고부와 태인, 정읍을 잇는 교통요충지이지요.
이평면사무소가 위치한 곳은 배들평야의 농산물과 부안 줄포의 수산물이 거래되던 큰 장이 섯던 말목장터.
말목장터와 감나무~!
1894년 말목장터는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을 든 역사의 현장입니다.
1894년 2월 15일, 이곳에서 1.5km 떨어진 예동마을에 농민군들이 모였고 농민군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지휘 아래 다음날 새벽 고부관아를 점령했다고 하는데요.
전봉준은 고부관아로 진격할때 말목장터 입구에 있는 감나무 밑에서 조병갑의 탐학을 열거하고 봉기의 당위성을 역설했다고 합니다.
그날의 함성이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것 같네요 ~!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과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농민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고 살아갔을지 가슴이 아픕니다.
다음 전봉준 장군의 생가가 위치한 조소마을을 찾았습니다.
집 앞에 있는 우물은 전봉준 장군이 거주할때 사용하던 공동우물.
녹두장군 전봉준 생가.
동학농민군 지도자였던 전봉준이 살던 남향 초가집으로 1878년(고종 15)에 지어졌으며 이곳에 살며 농사일과 동네 서당의 훈장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다고.
생가의 주변에 넓은 공터가 있는 이유는 주변 가옥을 매입, 철거했기 때문으로 추정.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조선의 농민운동가이자 동학의 고부접주(接主).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체포되어 1895년 4월24일, 사형이 집행되었지요.
만약 거사가 성공하였다면 그가 바라는 세상이 한층 빨리 왔겠지만 오히려 외세만 끌어드리는 꼴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쉽고 분한 일이 아닐수 없네요.
다음으로 찾은 곳은 예동마을에 있는 만석보혁파비.
1898년 당시 고부군수로 재직중이던 안길수가 고부민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던 만석보를 혁파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만석보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부농민봉기를 유발한 고부군수 조병갑 학정의 상징물이었지요.
" 비각에는 비석이 2기 있는데 작은 비석은 "군수안길수만석보혁파비(郡守安吉壽萬石洑革罷卑)이나 글씨가 사라져 읽을수조차 없고,
큰 비석은 "군수김우현휼민선정비(郡守金佑鉉恤民善政碑)"라고 겨우 읽을수 있을 정도.
만석보혁파비 옆에 세운 동학농민혁명 최초봉기 상징조형탑.
농경지가 넓다보니 시련이 끝도 없네요!
조선시대에는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어려웠고, 일제때에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억압속에 모진 세월을 보내야 했으니.
다시 동진강을 넘어 백산성을 찾아 갑니다.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동진강 연안에 있는 백산(白山)은 산 전체가 흰색바위로 되어 있어 붙은 이름으로
정상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산성이 있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의 지휘소인 호남창의대장소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낮으막한 백산에 오르는 길.
백산 오름길에서 바라본 부안군 백산면.
지금은 부안땅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고부군 관할이었다고.
5분만에 정상에 서니 맞이해주는 "동학혁명백산창의비(東學革命白山倡義碑)".
부안 백산은 우리나라 근대사의 분수령을 가르는 대사건인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의 현장입니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에 맞서 고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1893.11월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결의하고 1894.1.10(음)에 고부관아를 점령하였으며 그 이후 무장기포를 거쳐 1894.3.26 호남 일대에서 모인 군중이 야트막한 백산에 집결하였으니 그 수는 34개 지역에서 모인 8천여명으로 전합니다.백산에 모인 군중은 지휘부를 비롯한 혁명군을 조직하고 봉기의 대의와 지향하는 바를 밝힌 백산격문, 강령에 해당하는 사대명의, 그리고 혁명군이 지켜야 할 12개 군율을 선포하였으니 이로써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일어서면 백산(白山)이라".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집결한 농민군이 앉으면 죽창 때문에 죽산이요, 일어서면 흰옷 때문에 백산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백산에서 만난 1916년의 백산 일대 지도.
말로만 들어오던 옛 모습이 상상이 않갈 정도로 겁나게 구불구불했던 동진강과 고부천.
일제때 동진강, 고부천의 직강화 공사가 시행되면서 지금처럼 곧은 하천으로 변한 역사가 있었으니 정말 놀라운 일.
백산에서 바라본 동쪽의 김제시 부량면 일대 풍경.
구불구불하던 동진강을 직강화하면서 이렇게 훌륭한 옥토가 탄생했으니 우리 선조들의 고통이 얼마나 컷을까요~~!!
앞에 보이는 수문은 밀물때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고 농업용수를 저장, 공급하는 기능을 가진 동진강제수문.
동학농민혁명의 참 정신을 상기하며 이 땅에 다시는 탐관오리의 횡포는 물론 외세의 침략과 수탈도 없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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