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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의 영령을 모셨던 장충단(奬忠壇).강바람의 유적답사 2015. 5. 15. 18:08
서울 장충단(奬忠檀)이 1895년 을미사변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제단이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1895년(고종 23) 을미사변때 명성황후가 무자비한 일본군에 의해 시해되었고,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하여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순직하였는데요.
고종황제는 1900년(광무 4), 이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장충단을 조성하여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제사를 드렸습니다.
원래 장충단의 규모는 상당히 커서 신라호텔, 동국대학교 일부, 국립극장, 자유총연맹, 리틀야구장 등을 아우르는 면적이었고,
건축물은 사당과 부속건물 등 여러채였다고 합니다.
1910년 한일병합후 장충단은 일제의 강압에 따라 제사가 폐지된후 벚꽃을 심는 등 공원으로 바뀌었고,
그후 사당이 있던 자리에는 이토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라는 큰 절이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박문사는 해방후에 철거되고, 1960년대에 영빈관(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이 들어섰는데요.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썼다는 장충단 비석은 당초 영빈관 자리에 있다가 1969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조촐한 모습으로 꾸며 놓았으나 아직까지 사당은 복원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늦은감이 없지않지만 지금이라도 장충단의 사당 등 제 모습을 복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입니다.
* 1895년 을미사변때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제단인 장충단.
사당과 부속건물 등 당시의 건축물들은 모두 사라진채 비석만 남아 황량함을 더할 뿐입니다.
* 고종황제에 의해 1900년에 만들어진 국립현충원, 장충단.
원래는 신라호텔, 국립극장, 동국대학교 일부까지 아우르는 큰 규모였지만 계속 잠식되어 현재는 아담한 공원 형태.
* 지금은 없어진 사당 앞에 있었을 장충단 비석 - 비석 앞면의 장충단 세 글자는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라고.
* 비석 뒷면의 글씨는 장충단을 만들게 된 경위와 의미를 적고 있다는데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의 글씨라고 합니다.
* 신라호텔의 영빈관 자리는 원래 장충단의 사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합니다.
* 이 자리엔 일제때 이토히로부미을 추모하는 박문사라는 절이 지어졌다가 해방후 철거된후 영빈관이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 장충단 사당 → 박문사 → 영빈관)
* 일제시대의 박문사 모습(퍼옴)
* 영빈관 옆 암반에 새겨져 있는 "민족중흥" 글씨.
박정희대통령의 글씨로 보이는데 부국강병으로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자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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