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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16. 2. 4. 17:55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마을 안에는 석실서원묘정비 등 4기의 옛날 비석이 모아져 있어 이채롭습니다.
4기의 비석은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취석(醉石), 송백당유허비(柗栢堂遺墟碑), 도산석실려(陶山石室閭).
옛부터 안동 김씨의 3대 거점이 있으니, 안동 풍산의 소산마을과 서울의 장동, 경기도 남양주의 석실(石室)입니다.
안동김씨에게 소산마을이 세거지지(世居之地 - 조상 대대로 살고 있는 곳)라면, 서울의 장동은 정치에 참여하던 근거지였고, 석실(石室)마을은 사후 편안히 잠들수 있는 세장지지(世藏之地 - 조상 대대로 묘를 쓰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석실서원묘정비를 이해하려면 우선 석실서원(石室書院)부터 알아봐야 하는데요.
석실서원은 척화신이었던 김상용, 김상헌 형제의 충절과 학덕을 기히기 위해 1656년(효종 7), 남양주시 수석동(서원말) 한강가 언덕에 세웠던 서원입니다.
안동김씨의 비호를 받던 석실서원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사라지는 운명을 맞이 했지요.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는 1672년 건립되어 석실서원 뜰에 있었는데요.
1868년, 대원군때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사라지고 묘정비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가 일제때 연고가 깊은 안동김씨의 세장지지인 석실마을로 옮겨 온것 입니다.
묘정비가 있던 수석동(서원말)과 옮겨간 석실마을은 약 8km 떨어진 가까운 거리.
취석(醉石)은 도연명의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요.
도연명이 술에 취하면 집 근처의 바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바위를 취석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요.
청음의 손자인 김수증은 부친인 김광찬을 석실에 모신 뒤 이곳에 도산정사(陶山精舍)를 건립함과 아울러 우암의 글씨를 받아 1672년, 취석(醉石)]이라는 대자(大字)를 돌에 새겨 세웠습니다.
송백당유허비(柗栢堂遺墟碑)는 송백당이 허물어지고 40여년이 지난 1861년(철종 12), 김문근(金汶根)이 비문을 짓고, 김보근(金輔根)이 글씨를 써서 세웠는데요.
1645년(인조 23), 김상헌 선생이 심양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이곳 석실마을의 '송백당'이라는 별서로 돌아와 1652년 83세의 일기로 별세할때까지 머물렀던 집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엔 주로 석실산인(石室山人)이라는 호를 썼기에 석실마을이라는 이름도 생긴것 같습니다.
길게 세운 도산석실려(陶山石室閭)는 도산석실임을 알리는 비석인데요.
도산정사(陶山精舍)는 1668년(현종9) 김수증, 김수흥, 김수항 등이 부친 김광찬을 위해 석실마을에 세웠으나 오래전에 사라져 정확한 위치는 알길이 없습니다.
* 사진의 왼편부터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취석(醉石), 송백당유허비(柗栢堂遺墟碑), 도산석실려(陶山石室閭).
* 1930년대 일제때 수석동 석실서원터에서 석실마을로 옮겨온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
언젠가 다시 제 자리를 찾을 날이 올런지 --- !
* 1672년, 송시열이 짓고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이 글과 전(篆)을 썼다고.
* 옥개석의 낙수물로 움푹 패인 비좌 모습.
* 도연명의 고사에 따라 송시열이 써 준 글씨를 김수증이 각자한 취석.
* 김상헌 선생이 심양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와 은거하던 송백당터에 세웠던 송백당유허비.
* 석실마을의 도산정사 앞에 세웠던 도산석실려 비석.
* 남양주시 수석동의 석실서원터와 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석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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