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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광릉, 봉선사를 답사하고 광릉숲길을 걷다.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0. 9. 17:54
남양주 광릉, 봉선사를 답사하고 광릉숲길을 걸었습니다.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릉!
세조는 1417년 세종의 둘째로 태어나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으며 대군 시절에 왕을 도와 국가의 행정실무를 맡은바 있습니다.
단종(端宗)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1453년에 계유정난으로 반대세력을 없애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희왕후는 윤번의 딸로 1428년에 수양대군과 혼인하였으며 세조 사이에서 2남(추존 덕종, 예종) 1녀(의숙공주)을 낳았습니다. 1469년에 예종이 돌아가고 성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분입니다.
광릉을 답사하며 다소 실망스런 모습을 보았는데요.
세조와 정희왕후의 릉은 서로 떨어진 동원이강릉 형태인데 예전에는 그 중간이 숲이었는데 몇년전 숲을 모두 제거한후 서로 마주볼수 있는 모양으로 바꾼 겁니다.
숲을 제거하였으면 흙으로 덮고 잔디를 입혀 사초지를 곱게 만들어야 했는데 멀리서 보면 발굴한 것처럼 혹은 큰 수해를 본 것처럼 돌들을 모두 드러나게 해놓았으니 이건 릉을 완전히 훼손한 것으로 밖에 보이질 않네요.
비슷한 형태로 서오릉의 명릉이나 동구릉의 목릉을 보면 답이 나올텐데 참으로 이해할수 없는 일이네요.
봉선사(奉先寺)는 고려 광종 20년(969)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지만 조선 제8대 예종 1년(1469) 세조의 위업을 기리고 릉침을 보호하기 위해 정희왕후 윤씨가 89칸 규모로 중창하고 봉선사라 고쳐 불렀습니다.
명종 6년(1551) 문정왕후가 불교중흥정책을 펴면서 이곳 봉선사를 교종(敎宗) 우두머리 사찰로 삼고 전국사찰을 관장하게 됩니다.
봉선사의 가람배치는 당초 궁궐건축과 사원건축이 혼합된 형식으로 대웅전이 놓이고 그 좌우로 어실각과 노전이 있었으며 지금도 기본 골격은 예전 그대로라고 합니다.
근년엔 독립운동을 펼치다 30세에 출가한 운허(耘虛, 1901~1980)스님이 동국대 역경원장을 역임하면서 대장경의 한글번역을 이곳에서 시도, 불교대중화에 주력한바 있으며 대웅전의 "큰법당" 현판은 그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고 하네요.
한편 절 입구 부도밭에는 1975년에 세운 춘원이광수기념비가 있습니다.
운허스님은 춘원의 동갑내기 8촌동생으로 해방후 친일변절자, 반민족행위자로 낙인 찍혀 갈곳없이 헤매던 춘원을 봉선사로 불러 집필활동을 이어가도록 도왔다고.
봉선사 다경향실(茶經香室)은 춘원이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집필한 곳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봉선사를 나와 잠시 광릉숲길을 걸었습니다.
광릉숲은 세조가 생전에 직접 이곳을 둘러보고 릉터를 정한 이후 경작과 매장은 물론, 조선시대 460여년 동안 풀 한 포기 뽑는것 조차 금지한 보호지역입니다.
오늘 잠깐 걸은 숲길은 국립수목원에서 지난해 개설한 봉선사에서 국립수목원까지 약 3km.
광릉가는 도로와 개천을 따라 아름답게 설치된 숲길인데 숲도서관, 숲놀이터, 사색공간, 산새소리 정원 등 10개 테마로 구성되었으며 일부 구간은 숲 안까지 연결되기도.
하지만 지난 여름 수해로 일부 구간이 훼손되어 현재 광릉까지만 걸을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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