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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공원에서 북촌로 고개를 넘어 성균관까지 답사강바람의 유적답사 2022. 4. 12. 09:23
북악산 등반후 삼청동 북촌로 고개를 넘어 성균관까지 걸었습니다.
이 길은 중앙중고교 후문을 통해 학교 안을 경유해야 하는데요.
학교 안에서 창덕궁 북쪽의 담장을 끼고 작은 언덕을 넘으면 성균관대학교가 나오지요.
그 작은 언덕을 이루는 능선이 바로 창덕궁과 연결되는데 유심히 살펴보면 북한산에서 시작되는 능선이 보현봉, 북악산을 거쳐 창덕궁 안으로 뻗어가는 모습입니다.
북악산의 곡성에서 숙정문을 거쳐 응봉으로 내려오는 능선은 한양도성의 좌청룡!
옛부터 북한산의 정기가 한양으로 내려오는 래용지맥(來龍地脈)이라고 하여 매우 신성시 해 왔는데 오늘 그 능선을 확인하니 매우 뜻깊다는 생각입니다.
작은 능선을 넘으면 성군관대학교.
성균관대학교에서 오랜만에 성균관(成均館)을 답사할수 있었는데요.
교육기관인 명륜당과 문묘인 대성전이 있는 성균관은 학교인 동시에 사당이었습니다.
성균관은 고려 말,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었지요.
조선 왕조가 한양천도를 단행한 후 지금의 명륜동에 터를 잡아 1395년(태조 4)에 착공, 3년만에 완공을 보았으며
전묘후학(前廟後學) 전통에 따라 앞쪽에 대성전과 동무, 서무의 문묘를 짓고 뒷쪽에 명륜당과 동재, 서재 등의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대부분의 건물들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1601년(선조 34)부터 5년에 걸쳐 다시 지은 것이며 1869년(고종 6)에도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고.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개국초에는 150인 이었으나 1429년(성종 11)에는 200인으로 증원하였는데 입학한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 나누어 기숙하면서 공부하였다고 하며 성균관에서 300일 이상 기숙하며 공부해야 관시(館試)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고.
성균관은 입학규정은 엄했으나 일정한 재학기간이나 졸업일은 없었으며 과거에 합격하는 날이 바로 졸업일이었다고 할수 있지요.
성균관 앞쪽에는 문묘인 대성전(大成展)이 있는데요.
문묘의 중심건물인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사당이기 때문에 화려한 단청은 없고 단청의 본래 색인 붉은 색과 푸른 색으로만 되어 있어 단아한 모습.
앞에는 동무, 서무가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대성전에는 현재 공자를 포함한 5성, 공문 10철, 송조 6현, 우리나라 18현을 봉안하고 있다고.
뒷편에 있는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는 영역이 성균관의 교육공간입니다.
왕세자까지 교육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부였으며 때때로 과거시험 장소로 사용되기도.
명륜당은 주로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공간으로 3동을 하나로 연결해 지었는데 가운데 건물은 마루로 되어 있고 그 양쪽에는 선생들이 거처하는 온돌방이라고 하네요.
명륜당 뒷쪽에 있는 존경각은 도서관이고, 육일각은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선비들이 문무를 겸비하기 위해 수련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성균관은 일대 12,000평이 사적 제143호이며 대성전, 명륜당 등 건물들은 일괄하여 보물 제141호로 지정된 상태이며,
문묘에서 해마다 봄, 가을 두차례 지내는 제사인 석전(釋奠)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북악산 남측면 등반 후 삼청공원으로 하산하여 북촌을 가기로~!
삼청동 감사원 앞 고갯길을 걸으며 바라본 북악산.
으시시하던 북악산 일대에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해 지면서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네요.ㅎㅎ
중앙중고교를 보니 불현듯 성균관대 방향으로 가고 싶은 생각!
북촌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중앙중고교을 방문.
중앙중고교 후문에서 바라본 창덕궁과 서울 도심.
역사 깊은 중앙중고교는 학교건물도 오래 되고 조경도 좋아 둘러볼만 하지요.
중앙중고교를 찾은 이유는 창덕궁 뒤를 걸어 성균관대학교 방향으로 갈수 있기 때문.
구간은 짧지만 가는 길이 무척 호젓하여 사색하며 걷기에 아주 좋지요.
창덕궁과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중앙중고교.
중앙중고교 안에 있는 창덕궁의 북쪽 담장.
창덕궁 담장이 이곳을 둥그렇게 지나 명륜동 방향으로 넘어 가네요.
담장 아래 수구는 야생짐승들의 통로로 이용될듯.
북한산 멧돼지가 이곳으로 해서 들어올수도 있다는 생각.ㅎㅎ
중앙중고교 뒷길을 걸으면 나타나는 능선.
북한산에서 시작되는 능선이 보현봉, 북악산을 거치고 와룡공원 위의 응봉(매봉)에서 다시 남쪽으로 연결되어 창덕궁 안으로 뻗어가는데요.
옛날부터 북한산의 정기가 능선을 따라 한양으로 내려온다고 하여 매우 신성시해 왔지요.
그 능선에 산책용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네요.
가운데가 능선 위로 올라 와룡공원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이 성균관대학교로 가는 길.
창덕궁 담장을 따라 조금 걸어 능선에 올라서니,
능선에서 바라보이는 서울 남산.
창덕궁으로 뻗어 내리는 능선을 넘으니,
중앙중고교에서 능선을 넘으니 성균관대학교가 보이기 시작.
능선의 숲길은 성균관대학교 사유의 길.
창덕궁 담장이 있는 이곳은 창덕궁과 성균관대학교 사이.
위치로 보면 창덕궁 후원의 뒷편이고 창덕궁의 북쪽이 됩니다.
왼쪽으로 성균관대학교 대운동장.
담장 안으로 보이는 곳이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깊숙한 곳.
태극정, 청의정이 바로 안쪽에 있지요.
담장 밑에서 발견되는 감사원~성대간 도로개설공사 돌비석.
지금 걸어온 길이 1995년에 개설된 감사원, 성균관대학교간 도로였네요.
양쪽에 폭 6m 정도의 도로는 뚫렸지만 북한산에서 뻗은 산줄기 약 150m 정도만 공사를 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실정.
도로개설때 옛부터 신성시 하던 산줄기를 훼손해야 하니 시민들의 반대가 심했나요?
30년 전에 감사원, 성균관대간 도로개설 된 모습.
짐금은 학생들과 와룡동, 명륜동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지요.
도로개설이 중단되지 않았으면 막힌 길도, 높다란 축대도 생기지 않았을것 이라는 생각.ㅎㅎ
학교 옆 명륜동으로 내려오는 길은 "심산길".
심산길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사회운동가인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길.
1946년 전국 유림을 결성하여 유학발전과 후학양성을 위해 성군관대학교를 설립, 초대 학장을 지낸 분입니다.
갑자기 높은 기와담장이 우뚝!
학교 안으로 들어서니 성균관이 나타나네요.
마치 궁궐처럼 건물 규모가 크고 웅장한 느낌.
성균관 정문인 신삼문(神三門) 일대 모습.
신삼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으로 제사 지낼때만 문을 연다고.
성균관(成均館)은 고려 말,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었지요.
조선 왕조가 한양천도를 단행한 후 지금의 명륜동에 터를 잡아 1395년(태조 4) 에 착공, 3년만에 완공을 보았으며 대성전과 동무, 서무의 문묘를 비롯하여 명륜당과 동재, 서재 등의 건물을 완성하였습니다.
대학교 정문 안에서 보이는 탕평비각과 하마비.
탕평비(蕩平碑)는 1742년(영조 18) 영조의 친필을 담아 세운 것으로 원래는 성균관 앞의 반수교 옆에 있었다고.
옆에 세워진 하마비에 적힌 "대소인원과차자개하마(大小人員過此者皆下馬)"는 벼슬이 높거나 낮거나 모든 관리는 여기서 부터 말에서 내리라는 표지.
그런데 말에서 내리는 지점이 품계에 따라 각기 달랐다고 하네요.ㅎㅎ
정문은 닫혀 있어 동쪽에 있는 동삼문으로 출입.
유생들이 기숙하던 명륜당 동재.
극소수의 수재들만 들어와 공부하던 곳으로 명륜당 방향으로는 창문만 있는 모습.
과거 지망생들이 성균관에 들어오려면 우선 소과(작은 과거)에 합격해야 했으며 그 다음은 성균관에 들어와 숙식을 하면서 대과를 준비했다고.
조선시대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대과를 통과해야 했다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지.ㅎㅎ
유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던 동재의 바깥면.
다닥다닥 붙은 온돌방과 좁은 툇마루가 아주 이색적이네요.
그런데 방문이 명륜당 방향에 있지않고 바깥쪽으로 나있어 신성한 명륜당 분위기를 해치지않고 유생들의 편안한 출입을 도모한듯.
오호, 거대한 은행나무와 마주하고 있는 명륜당.
천연기념물 제59호인 은행나무 노거수와 역사 깊은 명륜당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시키네요.
은행나무가 있는 것은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고사가 전해져 성균관이나 향교와 같은 국립학교에는 반드시 심었다고.
노란색으로 변할 가을에 꼭 다시 찾을 것을 약속하며~~!!
나이가 500년이 넘었다는 성균관 은행나무.
6.25 사변때 포탄을 맞아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가까스로 상처가 치유되었다는 후문.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히는 집'이라는 뜻의 성균관 명륜당.
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맞배지붕이며, 좌우익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 형태.
명륜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교육을 위한 강당.
현판은 1601년 사신으로 왔던 명의 주지번(朱之蕃)이 썼다고.
옛 글씨가 가득 걸린 명륜당 내부 벽체.
동재 앞에 있는 돌판의 의미는~?
성적이 잘 않나왔을때 유생이 이 돌에 올라가 스스로 자신의 종아리를 쳤다는 믿지 어려운 얘기.ㅎㅎ
한켠에서 꽃망물을 터트리는 명자꽃.
탐스럽게 핀 벚꽃.
무척 화사하게 보이는 벚꽃.
우리 고유의 수종인지 뭔가 좀 달라 보이네요.
다음은 앞쪽에 있는 문묘(文廟)를 답사.
문묘에 있는 묘정비각(廟庭碑閣).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석이나 망을 씌워 관찰을 어렵게 해 놓은 실정.
문묘의 대성전(大成展).
대성전을 정전으로 하고 앞쪽 좌우에 동무, 서무를 갖춘 모습이며 제사공간이라 대성전 앞으로 신도(神道)가 마련되어 있네요.
1398년 완성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1601년(선조 34) 다시 중건했다고.
앞에 있는 측백나무는 유교에선 소나무와 더불어 올곧고 변하지 않는 군자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한 모습으로 잘 건축된 대성전.
기단의 월대가 명륜당 보다 한층 더 높다고.
대성전에는 공자를 정위로 하여 4성, 10철, 송조6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판을 봉안하고 봄,가을로 석전을 봉행하고 있다고.
오랜 세월동안 중국의 성현들을 롤모델로 삼아 학문을 숭상하는 일은 어쩔수 없다고 하지만 그들을 받들어 제사지내고 있음은 다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네요.ㅎㅎ
대성전 서쪽의 깊숙한 곳에 있는 우아한 모습의 대학당(戴學堂).
원래는 수복청으로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며 남자하인들이 거처했다고.
눈길을 끄는 대학당의 주목.
비록 옆으로 쓰러지는 모습이지만 문묘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으니 아주 소중해 보입니다.
명륜당의 서재.
동재와 달리 조용하고 차분한 학습분위기를 엿볼수 있네요.
본 건물과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비천당(丕闡堂).
재생들의 학습장소 또는 과거시험을 보던 장소로 사용되던 건물로서 6.25 사변때 소실되었다가 1988년 복원되었다고.
알찬 답사를 마치고 성균관대학교 정문 앞에서 오늘 여행을 마무리!
삼청공원~중앙중고교~창덕궁 뒷편 담장~성균관대학교~성균관까지 약 2km 정도 걸으며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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