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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홍유릉(洪裕陵)과 후궁묘역강바람의 유적답사 2023. 8. 18. 11:15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유릉(洪裕陵)을 찾았습니다.
홍릉은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1852~1919)과 명성황후 민씨(1851~1895)의 릉이며,
유릉은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1874~1926)과 순명황후 민씨(1872~1904), 계비 순정황후 윤씨(1894~1966)의 릉입니다.
고종은 1897년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왕릉이 아니라 황제릉으로서의 위용을 갖춘 모습입니다.
기존 조선왕릉과 다른 점은 제향공간에 있는 정자각 대신 침전(寢殿)을 두었다는 것, 또 하나는 침전 앞부터 홍살문까지 문,무인석과 석수를 배치하였다는 점이지요.
홍유릉 뒷편의 서쪽 야산에는 대한제국 황실 후궁들의 묘역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울타리를 막아놓아 늘상 궁금했었는데 최근 출입문, 안내문 등을 설치하여 전면 개방하였네요.
황실 후궁의 묘는 모두 5기로 고종의 후궁은 광화당 이씨, 삼축당 김씨, 귀인 장씨이며 의친왕의 후실로 수인당 김씨, 수관당 정씨.
물론 고종의 후궁은 여러명이어서 순헌황귀비 엄씨, 영보당 귀인이씨, 귀인장씨, 내안당 귀인이씨, 보현당 귀인정씨, 복녕당 귀인양씨, 광화당 귀인이씨, 삼축당 김씨, 정화당 이씨 등이 있었지요.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로구 사간동에서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살았고 사후에도 나란히 묻혔습니다.
고종의 두번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1877~1955)은 13명의 후실이 있었지요.
묘는 뿔뿔이 흩어져 있으나 수인당 김씨, 수관당 정씨 등 2기가 이곳에 있습니다.
이곳에 황실 후궁묘역에 광화당 이씨 묘가 1967년에 조성되었고, 삼축당 김씨의 묘가 1970년에 조성된바 있습니다.
그리고 고종의 아들 의친왕의 후실인 수인당 김씨의 묘가 조성된 이후 고양 서삼릉 경내에 있던 귀인 장씨와 수관당 정씨의 묘가 2009년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제에 나라를 뻬앗기는 망국의 한을 품은채 또 황실의 해체로 사가로 나와 어렵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이니 가슴 넘 아프네요.
남양주시 금곡의 홍유릉을 찾았습니다.
황제릉이라 일반 왕릉에서는 볼수없는 무척 크고 웅장한 정문이 특이합니다.
홍유릉 외에도 영원, 회인원, 의친왕 묘, 덕혜옹주 묘, 황실 후궁묘역이 있는 홍유릉권역.
먼저 찾은 유릉은 1926년에 조성된 조선왕조의 마지막 릉이지요.
유릉의 재실.
망국의 한을 달래려 더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건축한것 같습니다.
재실과 바로 연결되어 옹색해 보이는 유릉.
재실에서 바라본 유릉.
제27대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계비 순정효황후가 잠들어 있지요.
참도 양편에 늘어선 석조물과 침전이 무척 웅장한 유릉.
석수들은 홍릉보다 크고 조각도 사실적.
9년 미리 조성한 홍릉의 석조물들이 넘 왜소하고 졸작이라는 평에 따라 유릉에는 많은 정성을 기울이고 큰 신경을 썼네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일자형 건물인 침전(寢殿).
정자각처럼 제사를 올리는 공간인데 정자각과 달리 정면에도 계단이 설치되어 있네요.
마치 궁궐의 정전처럼 꾸며진 침전의 내부 모습.
중앙의 창호지가 달린 문을 열면 바로 릉을 보며 제례를 지낼수 있지요.
침전 앞에서 바라본 석조물들.
문인석, 무인석,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매우 사실적으로 배치된 모습.
그러나 말을 제외하고는 모두 낯선 동물들이라 의아스럽기도 하며 당시에 세간의 관심이 무척 컷을듯.ㅎㅎ
비각 안에 "순종효황제 유릉 순명효황후 부좌 순정효황후 부우"라고 전서체로 쓰인 비석.
대한(大韓) 국호는 오른쪽 상단에 별도로 새겨 넣은 상태로 1966년 순정효황후를 모실때 다시 제작한 비석입니다.
관리인의 도움을 받아 오른 유릉.
조선왕조 정확하게는 대한제국 마지막 릉으로 순종과 황후 두 분을 같이 모신 동봉삼실(同封三室)의 합장릉은 유일한 예인데요.
순명효황후는 1904년 33세에 별세하여 광진구 능동(현 어린이대공원)에 묻혔다가 1926년에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순정효황후는 1966년 71세로 별세하여 이곳에 묻힌 역사가 있습니다.
12면 병풍석에 12칸 난간석을 두룬 황제릉의 위엄있는 모습이나 능침 주위에 문,무인석과 석양, 석호는 배치하지 않아 허전하기도.
봉분 앞에 있어야 할 문,무인석은 침전 앞으로 옮겨져 낯선 석수들과 함께 배치되었으나 석호와 석양은 아예 없어진 상태.
아련히 초등학교때 유릉에 소풍와서 마냥 신기해 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참도 좌우의 석수에 올라타서 사진 찍고 놀던 철부지 시절.ㅎㅎ
소나무길을 걸어 홍릉으로 가는 길.
홍릉가는 길에서 만나는 연지.
동구릉에서도 연못을 본적이 있었는데 둥근 연지는 다소 의외라는 생각.ㅎㅎ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와 명성태황후의 홍릉.
홍살문 좌측에 있는 재실.
왕릉의 재실보다는 무척 규모가 크고 화려한 느낌.
재실의 목조건물들이 상당히 크고 화려하여 눈여겨 볼만.
망원으로 당겨본 홍릉은 잠마로 부분 훼손된 모습.
봉분 앞에 있어야 할 문,무인석은 침전 앞으로 옮겨져 낯선 석수들과 함께 배치되었으나 석호와 석양은 아예 없어진 상태.
정면에서 바라본 홍릉.
릉에 이르는 좌우에 배치된 석수들을 보니 마치 사열을 받는 느낌.ㅎㅎ
특이한 모습을 한 홍릉의 침전.
일자형으로 일반 왕릉의 정자각과 같은 용도이지요.
경험없이 처음 황제릉으로 조성하다보다 문,무인석과 석수들이 무척 왜소하고 예술성도 떨어지는 느낌.
침전에 이르는 참도 좌우에 한쌍씩 서있는 석조물들.
명성황후의 릉은 당초 청량리 홍릉수목원 자리에 있었지만 1919년 금곡으로 천장한바 있고 홍릉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앞에 작은 담이 있는 곳은 제정(祭井)으로 제사때 쓰는 우물이 있지요.
비각 안에 "대한 고종태황제 홍릉 명성태황후 부좌" 라고 전서체로 쓰인 비석.
일제강점기여서 '대한(大韓)' 국호를 넣을수가 없었지요.
그 문제로 몇년째 비석을 세워지 못하다가 1922년 홍릉참봉 고영근에 의해 '대한(大韓)' 2자를 새겨넣고 비석을 세웠다니 하니 정말 그의 기개가 자랑스럽네요.
이러한 사실이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비석을 보려고 전국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는 후문.
오호, 뒤로 넘어가는 문이 열려 있네요.
늘 잠겨 있던 문이었는데 --- !!
작은 문을 지나 경사진 길을 내려오면 영원 가는 길.
영원, 의친왕 묘, 덕혜옹주 묘에 가는 길인데 막혀 있네요.
태풍으로 쓰런진 나무를 베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영원, 의친왕 묘, 덕혜옹주 묘는 다음에 가고 황실 후궁묘를 보기로.
새롭게 단장하여 전면개방한 대한제국 황실 후궁묘역.
황실 후궁의 묘는 모두 5기로
고종의 후궁은 광화당 이씨, 삼축당 김씨, 귀인 장씨이며 의친왕의 후실로 수인당 김씨, 수관당 정씨
예전에는 울타리를 막아놓아 늘상 궁금했었는데 최근 출입문, 안내문 등을 설치하여 전면 개방하였네요.
처음 만나는 의친왕 후실, 수인당(修仁堂) 김씨 묘.
의친왕의 2번째 후실로 행적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3남(이우, 이주, 이곤)을 낳았지요.
특히 첫째 아들 이우(李鍝)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때 사망한바 있습니다.
솔향기가 가득하고 무척 호젓한 분위기가 감도는 후궁묘역.
수관당 정씨와 귀인 장씨 묘.
의친왕 후실, 수관당 정씨(修觀堂 鄭氏) 묘.
고종황제의 아들인 의친왕의 첫번째 후실로 장남 이건(李䭈)을 낳았으나 역시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실정
수관당 정씨 묘는 처음 서삼릉 경내에 있었으나 2009년 이곳으로 이장했다고.
고종의 후궁, 귀인 장씨(貴人 張氏) 묘.
고종황제의 후궁인 귀인 장씨(1838~1887)는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1877년 궁인의 신분일때 의친왕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의친왕을 낳자마자 명성황후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10년 후 사망했다고 하네요.
처음 묘소는 학실치 않으나 1911년 광진구 화양동으로 옮겨졌고, 1965년 의친왕과 같이 서삼릉을 옮겨졌다가 2009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진 내력이 있네요.
언덕 위에는 광화당 이씨, 삼축당 김씨의 묘.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 종로구 사간동에서 서로 의지하며 같이 살았고 사후에도 나란히 묻혔습니다.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三祝堂 金氏) 묘.
고종의 후궁인 삼축당 김씨(1890~1970)의 본명은 김옥기(金玉基)로 김순옥의 딸로 태어나 1898년 궁녀가 되었으며
1911년 후궁이 되었으나 자식을 낳지는 못했다고.
순종의 배려로 삼축당이라는 호칭을 받았으며 종로구 사간동에서 살다가 81세에 별세했다고 합니다.
언덕 정상에는 광화당 이씨 묘.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光華堂 李氏, 1885~1967)는 본명이 이완덕(李完德)으로 1898년 궁녀가 되었고, 1906년에 고종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1914년 고종의 아들 이육(李堉)을 낳아 광화당에 봉해졌으나 왕자가 2살때 급사하여 불운한 시절을 보낸 분입니다.
광복과 6.25 사변을 겪은후 삼축당 김씨와 종로구 사간동에서 살다가 83세로 세상을 떠나 삼축당 김씨와 나란히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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