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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남한강변 수청나루터와 여성제(呂聖祭, 1625~1691) 선생 유적지 탐방강바람의 국내여행 2024. 9. 5. 10:31
광주 남한강변 수청나루터와 여성제 선생 유적지를 찾았습니다.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는 무척 아름다운 강변마을인데요.
수청리(水靑里)는 '한강의 푸른 물이 여울져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강에 큰 여울이 있어 청탄(靑灘), 물푸리여울이라고도 했고 강변에는 150호가 넘는 큰 마을이 있어 큰청탄 혹은 큰말로도 불렸는데요.
오랜 세월동안 수청나루가 있던 남한강은 갈수기엔 걸어서 건너기도 했지만 홍수 때에는 마을 앞까지 물이 올라와 동아줄로 집을 묶어놓기도 하며 삶을 이어가던 마을이었습니다.
행정구역은 광주이지만 생활권은 가까운 양평이어서 배를 타고 강건너 학교에 가고 농산물을 내다 팔기도 했으며 예전에는 뗏목이 쉬어 가는 장소여서 주막도 여러채 있었다고 하네요.
수청리 강변을 그린 그림이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 첫장에 나오는 녹운탄(綠雲灘)!
강변 절벽 위에 정자가 있고 언덕에는 여성재 선생의 생가로 여겨지는 기와집이 보이며 해협산에서 큰말을 통해 흘러오는 개울도 보이네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에는 드넓은 백사장과 갈대밭이 있었고 바위절벽으로 경치가 매우 빼어난 곳이었지만 50년전 팔당댐 건설로 수위가 약 5m 이상 높아지며 호수로 변해 옛 풍경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네요.
빈청각(賓請閣)이라는 택호를 붙인 여성제 가옥은 최근까지 사랑채만 쇠락한 상태로 남아 있었으나 2019년 해외이주한 후손에 의해 방치된 가옥은 철거되었고 남은 부재는 광주문화원에서 가져갔다고 하나 보존대책은 전무한 실정입니다.
수청리에는 여성제 묘와 1704년(숙종 30)에 세운 신도비가 있습니다.
조선 숙종대에 영의정을 역임한 여성제(呂聖祭, 1625~1691) 선생은 본관이 함양, 호는 운포(雲浦)로 친가, 외가가 모두 당대의 명문가 집안.
천성이 강직한 성품으로 1654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뇌물이 횡행하던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직언과 상소를 서슴치 않았던 인물.
당파싸움의 폐해로 유배생활 끝에 광주 수청리에 집을 짓고 은둔하면서 강을 따라 오가는 뱃편으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한양소식을 전하고 시국을 토론했다고 합니다.
오늘 땀은 많이 흘렸지만 수청나루터, 여성제 묘소와 신도비까지 성공리에 답사한 보람이 크네요.
광주 남한강변 수청리를 찾아 갑니다.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한 강변도로를 지나니 남종면 수청1리.
수청나루터와 여성제 묘역 및 신도비가 있다는 표지판이 보이네요.
여성제(呂聖祭, 1625~1691) 선생은 본관이 함양, 호는 운포(雲浦)이며 조선 숙종대에 영의정을 역임한 문신으로 이곳 수청1리에 생가터와 묘소가 있습니다.
수청1리 큰청탄 표석.
마을 앞을 흐르는 강에 큰 여울이 있어 청탄(靑灘), 물푸리여울이라고도 했고 강변에는 150호가 넘는 큰 마을이 있어 큰청탄 혹은 큰말로도 불렸는데요
수청교 위에서 바라본 수청리 강변마을 모습.
수청나루터에 가는 마을길.
예전엔 여성제 선생의 생가도 있고 나루터와 주막도 있어 번성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무척 쓸쓸한 모습.
나루터에 오가던 길은 산책로로 변하고 주변엔 습지공원을 조성.
오호, 300여년 동안 나루터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노거수.
느티나무 앞에는 나루터가 있어 배를 타고 오가던 사람들로 늘 분주했고 시끌벅적하기도 하여 수청리 사람들과 애환을 같이 하곤 했지만 언젠가 뱃길이 끊긴채 쓸쓸한 모습이네요.
오랜 세월 나루터가 있음을 알려주는 이정표이자 마을의 수호신으로 많은 역할을 해온 고마운 나무이지요.
평시에는 팔러가는 소를 매어두거나 그늘 밑에 앉아 배를 기다리기도 했지만 홍수시에는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매어 두기도 했겠지요.
여성제 선생과 나이가 비슷하지만 아직도 싱싱한 모습으로 나루터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아,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아름다운 강변 경치를 즐기며 옛날로 돌아가 사색에 잠기고 싶네요.
흔적만 남은 수청나루터.
생활권은 가까운 양평이어서 배를 타고 강건너 학교에 가고 농산물을 내다 팔기도 했으며 예전에는 뗏목이 쉬어 가는 장소였다고 하지요.
건너편 도곡리 나루에서 배를 부를때는 태극기를 올려 신호를 보내면 선장이 수청호를 몰고 가서 사람을 태워 왔다고 합니다.
수려한 풍경을 보여주는 수청리 남한강변.
50년전만 해도 드넓은 흰 모래밭 사이로 강물이 흘렀다는데 팔당댐 건설로 모두 수몰되어 호수가 되고 말았네요.
수청리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동력선 수청호는 승객감소로 인해 2022년 뱃길이 끊긴채 묶여 있네요.
아, 어찌 이런 일이 생겼나요. 아쉽습니다 ~~!!
나루터에 세운 수청리그림과 유래판.
강물이 맑고 푸르러 이름붙은 수청리(水靑里)는 경관도 좋고 역사도 깊어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네요.
겸재 정선이 경교명승첩 첫장에 그린 녹운탄(綠雲灘)은 바로 이곳 수청리 남한강변.
약간 과장되기도 했지만 강건너에서 바라보면 높은 해협산 아래 강변 풍경이 이런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절벽 위에 정자가 있고 언덕에는 여성재 선생의 생가로 여겨지는 기와집이 보이며 해협산에서 큰말을 통해 흘러오는 개울도 보이네요.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에는 드넓은 백사장과 갈대밭이 있었고 바위절벽으로 경치가 매우 빼어난 곳이었지만 50년전 팔당댐 건설로 수위라 약 5m 이상 높아지며 호수로 변해 옛 풍경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네요.
녹운탄의 소재가 되었던 수청리 강변.
겸재 그림 전문가인 최완수 선생이 지목한 녹운탄 현장으로 수위가 높아졌지만 강변풍경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빈청각(賓請閣)이라는 택호를 붙인 여성제 가옥이 있던 수청리 254 - 2.
산밑에 있던 여성제 가옥은 행랑채는 6.25 사변때 소실되고 사랑채만 최근까지 쇠락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요.
2019년 해외이주한 후손에 의해 방치된 가옥은 철거되었고 남은 부재는 광주문화원에서 가져갔다고 하나 보존대책은 전무한 실정.
언젠가 복원을 한다면 수청나루터와 함께 훌륭한 문화유산이 될것 같습니다.
가을햇살을 받아 더욱 화사한 생가터 앞의 무궁화꽃.
다음은 해협산 자락에 있는 큰청탄마을(큰말)을 찾아 갑니다.
큰청탄마을 가는 길은 수청고샅길.
사부작사부작 누렇게 변하는 논을 보면서 마을의 옛 길을 걷는게 너무나 낭만적일것 같네요.
마을 입구에서 약 1km의 수청고샅길이 시작되고 해협산까지는 2.9km.
수청고샅길을 걸어 큰청탄마을(큰말)을 통해 고개를 넘으면 퇴촌 방향으로 갈수 있으니 옛 사람들도 이 길을 이용하지 않았을지 생각해 봅니다.
남한강 수청나루에 의지하여 살아가던 큰청탄마을.
예전에는 찻길이 없어 고립된 생활을 하였으나 1993년 현재의 도로가 확포장되어 교통이 무척 편리해 졌다고.
수청리 마을은 원래 함양 여씨들이 모여살던 집성촌이었으나 해방 이후 민족지도자 여운형이 좌익으로 몰리면서 이곳 사람들도 대부분 뿔뿔이 흩어졌다고.
알알이 영글어 가는 벼이삭을 보니 벌써 가을이 왔나요!.ㅎㅎ
여성제 묘역 및 신도비 0.2km 안내표지.
몇번이나 헛걸음을 했나요!
오늘은 기필코 여성제 묘역 과 신도비를 꼭 찾아내 답사하기로.ㅎㅎ
눈치채고 피하려는 어르신을 붙잡고 신도비의 행방을 여쭈어 보니 고맙게도 개인주택 뒷편으로 안내해 주시네요.
오호, 밤나무 밑에 서있는 여성제 신도비!
처음에는 묘역 입구의 좋은 위치에 세웠겠지만 마을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주택지 안에 감추어진 실정.
높이가 3.9m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질이 좋다는 오석으로 만들었는데 보존이 매우 양호한 상태.
1704년(숙종 30)에 세운 당당한 모습의 여성제신도비.
조선 숙종대에 영의정을 역임한 여성제(呂聖祭, 1625~1691) 선생은 본관이 함양, 호는 운포(雲浦)로 친가, 외가가 모두 당대의 명문가 집안.
천성이 강직한 성품으로 1654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뇌물이 횡행하던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직언과 상소를 서슴치 않았던 인물.
당파싸움의 폐해로 유배생활 끝에 광주 수청리에 집을 짓고 은둔하면서 강을 따라 오가는 뱃편으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한양소식을 전하고 시국을 토론했다고 합니다.
상단에 "領議政呂公神道碑銘(영의정여공신도비명)"이라고 새겨진 전액.
여성제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고난의 행군.ㅎㅎ
뱀이 많다고 하여 미리 준비한 장화를 신은채 결연한 마음으로 작은 개울을 건너 무작정 급경사의 산에 오르기 시작.
오호, 왜이리 나무가 많고 길도 않보이고 으시시한가요!
오호, 깊은 숲속에서 찾은 여성제 묘소.
장명등, 문인석, 망주석, 동자석, 상석, 묘표 등 석물은 온전하게 남아 있지만 떼가 죽어 묘의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난 실정.
동향으로 생가를 바라보고 있는 형상.
생전에 강가에 사셨으니 사후에는 높은 산 위로 올라 오신것 같습니다.
상석 전면에 새겨진 "領議政呂公床石(영의정여공상석)".
여성제 묘소의 묘표.
정경부인 강씨와 합장묘임을 말해 줍니다.
잘 보전된 조선 중기의 장명등.
오늘 땀은 많이 흘렸지만 수청나루터, 여성제 묘소와 신도비까지 성공리에 답사한 보람이 크네요.
광주시 남종면 수청1리에 있는 수청나루터와 여성제 생가터, 묘소와 신도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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