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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동 흥선대원군 별서(興宣大院君 別墅)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14. 10. 23. 22:49
2014.10/19(일)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흥선대원군 별서(興宣大院君 別墅)를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오랜 숙원을 푼 아주 감격적인 시간을 가졌는데요.
역시 상상한대로 수려한 인왕산 자락의 암반위에 햇빛 좋은 남향으로 자리하고, 동쪽으로 북악산이 훤히 바라 보이는 자태가 명당중의 명당으로 손색이 없더군요.
지금으로 부터 150년전 즈음, 이 멋진 별서를 손에 넣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흥선대원군의 욕심과 어쩔수 없이 별서를 포기해야만 했던 김흥근의 아픈 마음을 함께 읽을수 있어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현장의 설명문을 아래와 같이 옮깁니다.
「 인왕산의 바위산 기슭에 자리 잡은 흥선대원군 별서는 본래 조선 철종과 고종때의 중신 김흥근(金興根,1796~1870)이 조영해 별장으로 사용한 근대 유적이다.
김흥근이 언제 이곳(당시 삼계동정사로 통칭)을 조영하였는지에 관한 정확한 연대는 알수없지만, 일부 문헌을 통해 그 시기를 대략 1837~58년 사이로 추정해 볼수 있다.후일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섭정이 시작된 1863년을 전후하여 흥선대원군이 이를 인수, 별서로 사용하게 된다.
조선 후기의 학자 황현(黃玹)이 쓴 "매천야록"에는 흥선대원군이 김흥근에게 별서의 매매를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자 계략을 세워 아들 고종을 이곳에 행차해 묵게 하였고, 임금이 묵고 가신 곳에 신하가 살수 없다하여 김흥근이 이곳을 포기하자 이에 운현궁 소유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별서 인수후 대원군은 사랑채에서 난을 치는 등 이곳을 예술적 활동을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을뿐만 아니라, 고종의 행전이나 행궁, 즉 임시거처로도 사용하였을것으로 보인다.
본채 7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던 흥선대원군 별서는 현재 안채, 사랑채, 별채와 같은 살림채와 석파정(石坡亭) 등 4개 동이 남아 있다.
높은 자리에 위치한 별채의 구성과 별채로 진입하는 협문, 과거에 있었던 꽃담 등은 왕이 묵던 곳으로서 손색없게 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별서들 중 흥선대원군 별서와 같이 안채 이외에 별채를 가지고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더불어 현재 남아있는 석파정과 홍지동으로 이전되어 남아 있는 중국식 별당(석파랑) 역시 흥선대원군 별서의 독특한 특징을 잘 드러내는데, 김흥근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보았던 모습을 이곳에 재현한 듯하다.
흥선대원군 별서는 수려한 건축뿐 아니라 빼어난 산수와 계곡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사랑채 서쪽 뜰에 위치한 노송은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60호로서 유구한 세월동안 이곳과 운명을 함께 해 왔다.
흥선대원군 사후에도 대략 50년간 그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어 오다가 6.25 사변이 시작된 후 콜롬바 어린이집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민간에 이양되어 관리되어 왔다.
1974년 석파정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주)석파문화원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
* 인왕산 동쪽 자락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흥선대원군 별서.
* 흥선대원군의 별서와 주변 정원 안내도.
별서(사랑채, 안채, 별채), 석파정, 소수운렴암 각자, 너럭바위, 삼계동 각자, 신라 삼층석탑 등
* 인왕산 동쪽의 경사진 암반 위에 남향으로 조영하였으며 앞에는 계곡이 있어 매우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흥선대원군 별서.
흥선대원군은 이 집을 소유한후 별서의 앞 산이 모두 바위이므로 자신의 호를 석파(石坡)로 바꾸고, 정자의 이름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 별서의 마당 앞에는 암반으로 이루어진 수려한 계곡이 있는데요.
마당을 넓히려고 돌을 쌓으면서 계곡이 좁아지고 형상이 변하긴 했어도 아름다운 모습은 여전합니다.
* 수백년된 노송과 함께 가장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랑채.
* 지형에 맞추어 사랑채보다 한 단 낮게 건축되어 있는 안채도 우아하기는 마찬가지.
* 사랑채 앞 마당에 서면 동쪽으로 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오지요.
인왕산 자락에 있으면서 북악산까지 품은 흥선대원군 별서. 정말 명당중의 명당으로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 흥선대원군은 석파(石坡)에서도 볼수있듯이 뽀얀 바위를 무척 좋아했다고 하지요.
삼계동 각자가 있는 바위 옆으로 앉아 있는 별서와 노송의 조화가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 유구한 세월동안 흥선대원군 별서와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노송.
* 다시한번 사랑채의 우아한 모습을 살펴 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처럼 아름다운 한옥은 본적이 없는것 같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건물에서 한가로히 난을 치거나 주요 인사을 만나 정국을 의논하기도 했겠지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50년 전으로 돌아간것 같습니다. ㅎㅎ
* 누마루와 툇마루가 나란히 있어 창을 열어 혹은 툇마루에 앉아 수려한 계곡과 바위산을 볼수 있게 한 사랑채 구조.
* 잠시 툇마루에 앉아 흥선대원군의 체취를 느껴 봅니다.
* 사랑채와 안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별채로 들어가는 협문.
원래의 협문은 앙징맞은 중국풍으로 보아 김흥근이 청나라를 다녀온후 석파정과 같은 시기에 건축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 사랑채 뒷 언뎍에서 들여다 본 별채.
부드러운 목재로 지은 한옥의 아름다움과 노송으로 어우러진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네요. 멋져요!
높은 단에 건축되어 있으니 고개만 살짝 돌리면 북악산과 인왕산을 바라볼수 있고 늘 따사로운 햇빛이 비취니 옛날 흥선대원군이 휴식을 취하거나 국정을 구상하던 장소가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 별서의 사랑채 서쪽 후면에 있는 큰 바위.
바위 윗면에 삼계동(三溪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자못 유명하지요.
* 삼계동은 부근에 세 갈래의 내가 합처져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 글자 때문에 김흥근의 별서를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라 불렀지요.
* 사랑채 앞 마당에 놓여진 화려한 수조.
* 오솔길을 따라 석파정을 보러 갑니다.
* 별서의 서쪽 계곡 위에 세워진 석파정(石坡亭).
우리의 전통 건축양식과 청나라의 양식이 적절히 조합되어 있는 정자로 김흥근이 청나라 장인을 직접 불러와 조영했다는 설이 있지요.
* 정자에 남아 있는 청나라풍의 문살모양과 평석교의 형태 등을 통해 이국취향의 독특한 멋을 유추해 볼수 있는데요.
특히 바닥을 나무가 아닌 돌로 마강한 점은 건축적으로 매우 특이한 일이라고 합니다.
* 별서 서쪽으로 인왕산 자락을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나타납니다.
흔히 너럭바위라고 부르는데 코끼리를 닮아 코끼리바위라고도 하며 비범한 생김새와 영험한 기운으로 인해 소원을 이뤄주는 바위로 알려져 있답니다.
* 유심히 보면 코끼리를 닮아 보입니다. ㅎㅎ
* 계곡의 암반에 새겨져 있는 "소수운렴암(巢水雲濂庵)" 각자.
김흥근이 별서를 조영하기 전에 새겨진 글자로 추정되는데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으로 --- ." 등의 매우 운치있는시적표현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 산자락에 있는 신라시대 삼층석탑.
원래 경주 근처의 개인 소유 경작지에서 수습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조립하였고, 2012년 6월 현 위치로 이전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 별서 주위의 산기슭에는 오솔길이 조성되어 산책하기 아주 좋은데요. 하나는 "구름길", 또하나는 "물을 품은 길".
* "물을 품은 길"을 걷다가 남쪽 언덕에서 별서를 바라 봅니다.
앞 마당을 세멘트로 포장한 것만 빼고 우리 한옥의 최고 점수를 주고 싶을 정도로 우아하고 멋집니다.
* 오늘은 정말 오랜 숙원을 푼 감격스러운 날이네요. 조만간 또 방문하여 다시한번 찬찬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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