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바람의 유적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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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 등정하며 한양도성을 답사하다.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0. 12. 20:15
날씨가 워낙 좋아 칠궁 답사후 인왕산에 올랐습니다. 인왕산(仁王山, 338.2m)은 서울의 진산중 하나로 조선이 건국하여 도성을 세울때에 우백호(右白虎)로 삼았었지요. 그동안 인왕산엔 등산을 위해, 한양도성을 답사하기 위해, 선바위 등 유적답사를 위해, 야경사진을 찍기 위해 수도 없이 올랐는데요. 어렸을때 부터 멀리서 바라만 보던중 1968년 1.21 사태 이후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25년만에 다시 개방되었을때는 제일 먼저 등정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지요. 그동안 신비의 산이었던 인왕산엔 1993년 처음 올랐던것 같습니다.ㅎㅎ 오늘은 창의문로를 걸어 자하문 고개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인왕산에 올랐다가 무악동 방향으로 하산하였습니다. 쾌청한 좋은 날씨에 유적답사도 하고 등산도 하는 즐거운 하루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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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 칠궁(七宮)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0. 11. 09:20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사적 제149호, 칠궁(七宮)을 답사하였습니다. 칠궁 답사는 정말 감격스럽네요. 정확하게 10년전엔 몇달을 대기하여 청와대와 함께 묶어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간단한 절차만으로 칠궁만 따로 떼어 두번째 답사를 했습니다. 해설자도 없이 단독으로 조용한 답사를 즐길수 있었지만 다만 냉천정과 수복방이 보수중에 있어 완전한 답사는하지 못했으니 다소의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현지 자료에 의하면, 「칠궁(七宮)은 근래에 와서 붙여진 명칭으로 조선시대에 왕을 낳은일곱 후궁들의 신주를 모신 왕실 사당이다. 원래 이곳은 영조가 어머니 숙빈최씨를 기리기 위해 1725년(영조 1)에 지은 사당으로 처음에는 숙빈묘라 하였다. 이후 1744년(영조 20) 에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의미의 육상(毓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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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광릉, 봉선사를 답사하고 광릉숲길을 걷다.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0. 9. 17:54
남양주 광릉, 봉선사를 답사하고 광릉숲길을 걸었습니다.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릉! 세조는 1417년 세종의 둘째로 태어나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으며 대군 시절에 왕을 도와 국가의 행정실무를 맡은바 있습니다. 단종(端宗)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1453년에 계유정난으로 반대세력을 없애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1455년에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희왕후는 윤번의 딸로 1428년에 수양대군과 혼인하였으며 세조 사이에서 2남(추존 덕종, 예종) 1녀(의숙공주)을 낳았습니다. 1469년에 예종이 돌아가고 성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분입니다. 광릉을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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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한산성(南漢山城) 일주 답사기 --- 수어장대~서문~연주봉옹성~북문~동장대터~장경사신지옹성~동문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0. 8. 21:05
(1)편은 동문~남장대터~남문~수어장대까지의 기록이며. (2)편은 수어장대~서문~연주봉옹성~북문~동장대터~장경사신지옹성~동문까지의 일주기록입니다. 남한산성은 본성(本城)과 보조성곽인 외성(外城)으로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을 쌓았는데요. 본성은 중심이 되는 성이고, 외성은 병자호란 이후 추가로 본성 외곽에 쌓은 성을 말합니다. 봉암성은 벌봉(522m)에, 한봉성은 봉암성에 연결하여 한봉(418m) 주위에 쌓았으며, 신남성은 별도로 떨어져 남쪽의 검단산(524m)에 쌓았으나 답사는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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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한산성(南漢山城) 일주 답사기 --- 동문~남장대터~남문~수어장대.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0. 8. 20:53
쾌청한 날씨 속에 성곽을 따라 남한산성을 한바퀴 돌며 답사하였습니다. 남한산성을 간략히 살펴보면,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쌓았지만 그후 북한산성과 함게 조선의 도성인 한양의 방어를 위해 적극 활용한 산성입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주봉인 해발 498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연주봉(468m), 동쪽으로는 망월봉(502m), 남쪽으로는 여러 봉우리를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으며, 보완대책으로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축조하여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한바 있습니다. 사방에 큰 성문을 두었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 북문은 전승문(全勝門), 서문은 우익문(右翼門),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며 암문은 본성 11곳, 봉암성 4곳, 한봉성 1곳 등 모두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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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보광사와 소령원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10. 3. 12:17
조선 영조의 지극한 효심을 읽을수 있는 파주 고령산 보광사(普光寺)와 소령원(昭寧園)을 답사하였습니다. 보광사(普光寺)는 원래부터 역사 깊은 고찰이지만 인근에 조선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의 묘 소령원을 쓰면서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지요. 신라 진성여왕 8년(894) 도선국사가 창건한 보광사는 인근 10여리 밖의 영장리 능말에 있는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묘 소령원의 원찰로 삼으면서 왕실의 발길이 잦아졌고, 1740년 영조가 대웅보전과 광응전, 만세루 등을 중수한 역사가 있습니다. 대웅보전 오른편 어실각(御室閣)에는 숙빈최씨의 영정과 신위가 모셔져 있고 앞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있어 극진했던 효심이 전해 집니다. 소령원(昭寧園)은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이자 제21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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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혜음원(惠蔭院)터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9. 30. 20:44
파주시 광탄면에 위치한 사적 제464호, 혜음원(惠蔭院)터를 답사하였습니다. 먼저 혜음령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이미 900년전, 고려때 지은 큰 시설이 있었음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네요. 고려 예종 17년(1122) 건설된 혜음원은 한곳에 원(院), 절(寺), 행궁(行宮)이 모여 있는 아주 특이한 경우! 건물배치와 출토유물이 개성의 고려 궁터인 만월대와 아주 유사해 고려시대 궁궐배치와 건물구조, 생활양식 등을 살펴볼수 있는 아주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는데요. 원은 국립숙박시설로 출장중인 관원이나 일반 백성이 이용했다고 하며, 절은 사찰 본래의 기능 외에 원을 관리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고, 행궁은 왕이 개성에서 남경(서울)으로 가는 도중에 머물렀던 궁을 말하지요. 원, 절, 행궁이 같이 모여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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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두타산성(頭陀山城) 답사기.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9. 27. 20:22
강원도 동해시의 두타산 중턱에 두타산성(頭陀山城)이 남아 있습니다. 옛날에 쌓았던 성곽은 오래되면서 대부분 무너지고 지금 남은 규모는 몇십m에 불과하여 애초 성곽의 규모를 가름하기에는 무척 어려운 실정입니다. 험한 바위절벽 자체가 천혜의 요충지임에도 그 위에 산성을 쌓았으니 선조들의 지혜와 노고가 정말 대단한것 같습니다. 생각해 볼수록 어떻게 험한 바위산에 산성을 쌓아 외침에 대비했는지 놀라움을 금할수 없는데요. 나름 추정해 보면 두타산산성의 본성은 포곡식으로 두타산 중턱을 둘러 친 산성같으나 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다만 대궐터라는 지명이 남아 전해 집니다. 그리고 현재 사진처럼 볼수 있는 곳은 산성의 초입으로 본성과 한참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볼때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성으로 생각됩니다. 현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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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지내던 사직단(社稷壇).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9. 23. 10:32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조선 왕실 최고의 제례시설로 땅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를 지내던 제단입니다. 1396년(태조 4) 창건되었는데 고대 예제에 따라 종묘와 대칭되게 궁궐의 서쪽(오른쪽)에 두었으며, 단은 사단(社壇), 직단(稷壇)을 두되 사단이 동쪽, 직단이 서쪽에 설치되었습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때 전소된후 다시 복구된바 있는데, 잘 보존된 종묘와 달리 사직단은 일제때 두 단만 남긴채 부속건물들이 모두 철거되고 공원으로 조성된바 있으며 해방후에도 옛 터에 공공건물을 계속 지으면서 망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옛 건물은 사직단정문과 안향청(安香廳), 두 동뿐! 1960년대 이후에는 사직로 개설공사때 도로에 포함된 남쪽 부분이 크게 잠식되었고 사직단정문도 뒤로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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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지내던 종묘(宗廟).강바람의 유적답사 2020. 9. 23. 06:55
어릴때부터 종묘에는 소풍도 가고 여러 차례 답사도 다녔지만 사진을 담으려고 방문하기는 처음인것 같습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혹시 폐쇄되었을까봐 염려했지만 다행히 시간제관람으로 입장할수 있어 오랜만에 한적한 답사를 즐길수 있었습니다. 종묘는 1395년에 창건되어 유지되다가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17세기 초에 중건하였고 그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을 살펴보면,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 나라의 도읍으로 정하고 나서 바로 짓기 시작하여 1395년에 경복궁과 함께 완공했다. 궁궐의 동쪽에 종묘,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고대 중국의 예제에 따라 경복궁의 왼쪽인 이곳에 자리를 잡았..